‘아베 담화’의 밑그림이 나왔다. 일본 국제정치학자·언론인·기업인 등 일본 전문가 16명으로 구성된 자문단 ‘21세기구상간담회’가 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 아베 총리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오는 14일 아베 담화를 발표할 계획이다. 독자들이 직접 읽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이 대목을 눈여겨보라”고 짚어준 부분을 요약·정리한다.

이번에 자문단은 일본의 침략과 군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일본이 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썼다. 과거 일본 극우세력의 역사수정주의와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술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때는 서구도 다들 그랬다는 시각, 그러나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데 대해서는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겠다는 시각이 행간에 드러난다"고 했다.

“일본만 식민지 만든 것 아니다”

"(…) 20세기 역사를 되짚어 보기 위해서는, 19세기부터 봐야 한다. 19세기 유럽과 미국은 기술 혁신에 성공해 다른 지역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 시기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던 중국이 영국을 상대로 한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이 같은 기술 격차를 나타내는 세계사적 대사건이다.
이런 기술격차를 전제로 서양 여러나라들은 세계를 식민지화했다. 아시아에서는 식민지화를 면하고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대만을 식민지로 만들었다(1895년). 아시아와 별 인연이 없던 독일도 선교사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산동성을 세력권으로 삼았다(1898년).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인 미국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필리핀을 식민지로 영유했다(1898년)."(2쪽)

"러·일 전쟁으로 아시아에 용기 줬다"

"(…)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비(非) 서구 식민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1960년대에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리더 중에서는 러·일전쟁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다는 사람이 많았다(…)." (2쪽)

“일본이 아시아를 위해 싸운 건 아니었다”

“(…)일본이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벌였던 전쟁의 결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전쟁 때 일본의) 의사결정은 자존자위(自存自衛)의 이름으로 행해졌는데, 물론 그 내용과 방향은 틀렸고 아시아 해방을 위해서 한 일도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패전으로)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독립이 진전됐다. 그렇다고 국가 정책으로서 일본이 아시아 해방을 위해서 싸웠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4쪽)

"침략의 정의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명의 자문단 위원들이 '침략'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첫째, 국제법상 '침략'의 정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역사적으로 만주사변 이후를 '침략'으로 판단하는 것에 이론이 있다. 셋째, 그 무렵 다른 나라들도 같은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는데, 일본의 행위만을 '침략'으로 판정하는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3쪽 각주)

"(…)국제법의 성격은, 20세기 전반과 후반 사이에 많이 달라졌다. 20세기 전반의 국제법은 국가 간 분쟁의 개념을 명확하게 한정하고, 분쟁 요인을 박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19년 국제연맹규약, 1928년 부전(不戰)조약 등을 통해서, 당시의 국제법은 전쟁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세계적 흐름을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의 규약이 전쟁 자체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고, 부전조약에도 예외가 되는 자위권의 범위나 '전쟁에 이르지 않는 무력의 행사' 등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더구나 국제법상 '침략'의 정의에 대해서는 UN총회에서 이뤄진 '침략의 정의에 관한 결의(1974년)' 등도 있거니와, 국제사회가 (침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일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5쪽)

"메이지 유신 후 자유주의 확립 강조"

“(…)일본이 전후 70년 동안 걸어온 평화주의와 국제공헌 노선은 국제사회와 일본 국민 모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노선은 전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자유민권운동이 생기고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는 등 자유주의적 민주제와 더불어 국제사회의 규범을 수용하면서 이런 노선이 만들어졌다. 물론, 전후 일본이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고 국제사회로 복귀하는 과정에 미국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민주주의 발전과 국제평화, 자유무역에 기반한 국제질서 형성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2쪽)

"일본이 저개발국 원조하며 이익도 누렸다고 인정"

“(…)일본은 1950년대 초부터 정부개발원조(ODA)의 형태로 여러 나라와 경제협력을 시작했다. 일본은 1954년 콜롬보 계획에 가입하면서 기술협력을 시작했고, 1958년에는 최초로 엔화 차관을 인도에 제공했다. 일본의 ODA는 인프라 설비나 기술지원 등을 통해 아시아 여러나라의 경제발전에 많이 공헌했다. 다만 초기의 경제협력은 일본 생산품의 조달을 의무로 내건 ‘조건 전제형(tied)’ 지원이어서, 경제협력을 통해 일본경제의 부흥을 꾀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7쪽)

"미군이 패전국 일본에 관대했다고 인정"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의 일본 점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역사상 유례가 없던 비참한 전쟁이었기도 했지만 승자가 부과하는 징벌적인 요소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적잖은 일본인이 미국에 의한 점령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1962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점령은, 일본에 관대했고 일본인에게 유익한 부분도 많았다. 소비에트연방이 동독 및 동유럽 여러나라를 점령하면서 약탈에 가까운 행위를 한 것과 달리, 미국은 일본에서 노골적인 약탈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전후 식량 지원을 시작으로, 미국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일본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일본이 비(非)군사화된 것에는, 승자가 패자에게 가하는 징벌의 측면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을 민주화로 이끌고 경제발전을 지원해, 장기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했고 일본에게도 이익이 많았다(…)." (13쪽)

한국의 반일(反日) 정서가 강해진 과정

“(…) 한국은 1987년 민주화를 달성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킨 뒤 경제성장을 하면서 국제적인 지위가 높아졌다. 민주화를 이룩하고 강압적인 정치체제가 사라지면서, 한국 국내에서 감정적으로 대일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은 1990년대 전반부터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을 시행하는 등 한·일 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그 해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발표하고,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높은 차원의 관계를 만들어나가자고 합의했다. 오부치 총리는 ‘이번 세기에 한·일 관계를 회복하고, (일본이) 과거의 한 시기에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 지배로 인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끼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한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뛰어넘어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기반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우호적인 한일 관계는 그 뒤 노무현 정권 들어 변한다. 노무현 정권에는 ‘386세대’가 다수 참여했다. 386세대는 국민감정을 억누른 강압적인 정권에 크게 반발했던 세대로, 노무현 정권 안에서 반일(反日) 이념을 주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당초에는 고이즈미 총리와 정상간 셔틀 외교에 합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여론에 눌려 2005년 3월 3·1절 기념식에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고 배상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연설을 했다(…).” (25쪽)

"일본도 한국에 불만 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나 일본에서의 한류 붐 등으로 한·일 국민간의 교류는 늘었지만, 동시에 불만도 쌓였다. 한국인들은 일본 국민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역사문제를 필두로 여러 이슈에 대해 일본인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이 명확해지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를 갖게 됐다. 일본인들도 한국인들이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을 태연하게 뒤엎어 버리려 하고, 법의 지배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점에 경악하게 되면서 한국인에게 불만을 갖게 됐다.

2008년 한국에서는 10년 만에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가 탄생했다. 일본은 이명박 대통령이 이성에 기반한 대일(對日) 정책을 선택해, 노무현 정권 때 상처받았던 양국 관계가 개선될 거라고 기대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이성에 기반한 대일 관계를 생각했다. 그러나 2011년 8월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과 교섭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변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고, 그 해 12월에 열린던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성의를 드러낼 것을 요구했다. 이듬해 8월에는 (이 대통령이) 다케시마(※독도)에 상륙해,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동안 일본은 다케시마 문제를 키울 의도가 없었지만, 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행동 이후 태도가 변하게 됐다(…).” (26쪽)

박근혜 대통령의 감정적 반일(反日)

“(…)악화된 한·일 관계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감정에 기반한 대일외교를 추진하면서, 일본 측이 역사 인식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를 진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과거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는 이성에 기반해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추진한 것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지금까지 없었던 강경한 태도를 가진 대통령이다.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반일적인 단체의 영향력이 있다. 또 중국의 중요성이 높아져, 일본과의 협력이 덜 중요해지고 있는 점도 있다. 한국과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들(일본)이 무엇을 해야할까. 한국이 가진 이성과 심정 양방의 측면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 (26쪽)

"한·일 관계 좋아져야 한다"

“(…)왜 양호한 한일관계가 필요한 것인지 재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에 의존하고, 일본과는 이성적인 관계 형성에 소극적인 태도다. 한·일 양국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고 하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웃국가로서의 측면과 더불어, 양국 간의 경제관계와 아시아 지역에서의 안전보장분야를 두고 한·일 협력이 세계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대화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강경 자세가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고, 경제 분야에서는 한·일간의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한·일) 정권 간의 대화도 늘어날 여지가 있다(…).” (27쪽)

하지만 일본이 노력해도 효과 없지 않을까

“(…)일본은 특히 1990년대에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일본 측의 노력에 대해 한국 측도 일정한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는 부정적인 대일관이 강하게 남아있고, 한국 정부 역시 이러한 목소리를 대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아무리 일본 측이 노력하고 그 당시의 한국 정부가 (일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더라도, 이후의 한국 정부가 다시 없던 일로 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에 존재하는 대일 반발에 일본이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는다면, 양국 관계는 전진하지 않는다.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식민지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고통과 손해를 안겼다고 통절한 반성의 마음을 드러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뛰어넘어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기반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역사 인식문제를 두고 ‘골 포스트(골대)’를 움직여왔던 경위에 비추어보면, 한일 양국간에 영원히 지속되는 화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한국 정부도 같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한일 양국이 함께 검토해, 화해의 방법을 생각하고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