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고선웅(47)은 요즘 '손수건 파는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연출한 뮤지컬 '아리랑'의 공연장 로비에서 팔았던 손수건 500장이 순식간에 동났기 때문. 그건 지난 5월 공연한 연극 '푸르른 날에'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장인물이 모두 무대로 나와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농축된 설움과 한(恨)의 정서를 풀어내는 마지막 장면에선 터지는 눈물을 도저히 참기 어렵다.

이달 중순 개막 때만 해도 초조해 보이던 그의 표정은 이제 많이 안정돼 보였다. "사실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재작년에 처음 연출 제의를 받고 이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무대 위에 올릴까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도 사통팔달할 수 있는 게 뭔지 깨닫게 됐습니다. 바로 아리랑이었어요. 우리 가슴속의 아리랑이 울려퍼지게 하자!"

아리랑의 정서를 살리기 위해 2·3중창과 합창 등으로 이뤄지는 기존 뮤지컬 형식을 과감히 깼다. '진도아리랑'은 배우들이 북장단에 맞춰 부르고, '신아리랑'은 무반주로 부른다. "민초들이 숨어서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에서 과연 반주가 필요할까요?" 옥비 역을 맡은 국립창극단원 이소연은 구성진 소리를 뽑아내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뮤지컬‘아리랑’의 연출가 고선웅은“배우들 모두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뜨거운 우리의 것을 무대에서 끌어내도록 했는데, 그게 바로 아리랑 정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에서 우리 민족 정서를 천연(天然)과 무정형(無定型)의 것으로 묘사했고, 배우들에게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 정서를 유지할 것을 주문했다. 그 결과 '모든 배우가 마치 독립운동하듯 결의에 찬 연기를 한다'는 평을 들었다. "배우들 누구나 가슴속 깊은 곳에 갖고 있는 뜨거운 것, 아리랑 정서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 역 배우들이 무대 뒤로 가선 더 크게 엉엉 웁니다." 아직도 공연 때마다 아리랑에 '소름이 돋는다'는 그는 극 중 인물 득보가 낫을 들고 뛰어드는 장면을 통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대한 오마주(존경)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연극적인 요소가 강화되다 보니 일각에선 '뮤지컬이 아니라 노래하는 연극 같다'는 말도 나왔다. 여기서 고선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리랑조차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뮤지컬 식으로 만들어야 할까요? 새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늘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국적 뮤지컬의 새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일본을 절대악으로 묘사하거나 희화화한 게 아니냐는 말에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쓰러졌던 일본군이 마지막에 다 일어나서 함께 어우러져 상여를 멥니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과한다면 같이 화합할 수 있다는 메시지인 거죠." 주연을 맡은 안재욱은 일본 팬이 보낸 편지를 보여 줬는데, '작품을 보고 깊이 반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선웅은 "관객 모두 '내 속에 이런 DNA가 있었구나'란 느낌을 받고 광복 70주년에 새로 시작하는 기운을 받고 가셨으면 한다"고 했다.

'락희맨쇼' '칼로 막베스' 등의 연극으로 스타 연출가의 반열에 오른 고선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르멘' 같은 뮤지컬 연출도 꾸준히 해 왔고, 지난해엔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로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부문을 수상했다. 뮤지컬 '아리랑' 공연 기간 중에도 연출작인 연극 '홍도'(8월 5~2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와 '강철왕'(8월 14~30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이 예정돼 있다.

▷뮤지컬 ‘아리랑’ 9월 5일까지 LG아트센터,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