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난했던 라자로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합창단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송(32)의 손이 내려왔다. 40분 남짓 프랑스 작곡가 포레의 '레퀴엠'이 연주된 참이었다. 천상(天上)의 시간에 다녀온 듯 청중들은 잠시 멈칫하다 박수를 쏟아냈다. 지난 25일 저녁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뮤직텐트에서 열린 대관령국제음악제 저명연주가 시리즈 다섯 번째 무대였다. 반(半)야외공연장인 뮤직텐트를 나서자 잠시 멈췄던 비가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다.
해발 700m 대관령 고원에서 열리는 대관령음악제는 클래식 음악으로 무더위를 날려보내려는 애호가들이 믿고 찾는 곳이다. 지난 23일부터 시작된 저명 연주가 시리즈(총 13회)는 매회 매진 사례를 빚으며 표(票) 구하기 전쟁이 벌어질 정도다. 정명화·정경화 예술감독과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다솔, 김태형, 지난 5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 테너 정호윤, 소프라노 황수미 등 음악계 스타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24~25일 4차례 열린 저명 연주가 시리즈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 넷을 골랐다.
#1 손열음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24일 오후 5시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첫 무대에 선 손열음은 설렌 표정이었다. 보랏빛 드레스에 검은 니트를 걸친 손열음은 섬세하고 여린 터치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했다. 가야금을 뜯는 듯하기도 하고,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손열음 특유의 격정적인 스타일이 아니라 여성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연주 다음 날 만난 손열음은 "몇 년 전부터 하프시코드로 이 직품을 연주하고 싶은 꿈을 품었는데, 드디어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해결했다"며 뿌듯해했다.
#2 정경화의 크로이처 소나타: 24일 오후 7시 30분
역시 정경화였다. 1악장 마치고 돌아서서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를 보고 웃으며 손수건으로 땀을 훔칠 때 힘들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40분 넘는 베토벤의 대작(大作)을 여전히 힘있고 활력 넘치는 연주로 들려줬다. 피치카토는 머리카락을 뽑듯 단호하고 강렬했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 3분이 1이 일어섰고, 커튼콜에선 나머지 3분의 1이 더 일어섰다. 정경화는 베토벤의 스프링 소나타를 앙코르로 선물했다. 정경화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3 임지영의 구노 '파우스트' 주제에 의한 환상곡: 25일 오후 2시
지난 5월 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 낭보를 전한 임지영의 실연(實演)을 처음 봤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선배인 손열음과 호흡을 맞췄다. 임지영의 바이올린 소리는 첫 소절부터 탄탄했다. 구노 오페라 '파우스트'의 주요 선율을 바이올린으로 편곡한 비에니아프스키의 이 작품을 익숙한 듯 편안하게 연주했다. 작년까지는 학생으로 뮤직 아카데미에 참가했다는 임지영은 퀸 엘리자베스 우승 후 2016년까지 연주 일정이 빽빽하게 잡혀 있다.
#4 정호윤과 황수미, 페뤼송: 25일 오후 7시 30분
올해 대관령음악제 중 가장 일반 청중들의 호응이 좋았던 연주였다. 빈 국립오페라 전속 가수 출신 테너 정호윤은 '카르멘'과 '파우스트' 솔로 아리아 두 곡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깨끗한 미성(美聲)에, 성량까지 풍부한 정호윤은 반(半)야외 공연장인 뮤직텐트에서도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독일 본 국립극장 전속 소프라노 황수미는 '라크메'의 꽃의 2중창과 '호프만의 이야기' 뱃노래 2중창으로 특급 소프라노의 탄생을 알렸다. 포레 '레퀴엠' 솔로 아리아가 있었지만, 황수미에게 왜 오페라 아리아를 오롯이 맡기지 않았는지 아쉬울 정도였다. 아드리앙 페뤼송도 템포는 약간 빨랐지만, 뮤직텐트 공연에 어울리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지휘자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대관령음악제 저명연주자 시리즈는 다음 달 2일까지 이어진다. 문의 (033)240-1360 www.gmmf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