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의 삶은 백조와 같다. 패션쇼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라면, 작업실은 물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물장구치는 백조의 발과 같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봐야 하고, 수십 년 동안 모아온 가방과 구두, 액세서리들을 연구해야 한다. 해외에 나가서도 빈티지를 수집하고 시장조사 하느라 풍광을 즐길 여유가 없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최신 소재들을 테스트해보느라 잠을 설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물론 나를 흥분시키는 신선한 소재들,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 소품들에 둘러싸여 작업할 때의 그 행복감은 힘든 작업 과정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다. 다음 시즌 제품을 준비할 땐 한여름에 겨울옷 수백 벌을 입어보며 땀 흘려야 하지만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나왔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다. 그 디자인이 소비자의 요구에 들어맞는지, 사회 흐름을 담았는지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현실 감각이 부족해 그간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패션디자이너로서 가장 두렵다.
그런 점에서 디자이너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오만'이다. 동생과 함께 후배의 생일 파티에 간 적이 있다. 귀엽고 여성스러운 옷을 좋아하는 동생이 구슬 장식에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나왔길래 "완전 꽃순이 스타일이네" 하며 놀렸다. 한데 '반전'이 일어났다. 파티에 온 여인들이 죄다 동생의 옷차림에 매료되어 환호하는 게 아닌가.
'세상을 나에게 맞추려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요, 나를 세상에 맞출 줄 알면 현명한 사람'이란 말이 있다. 문제는 세상과의 타협을, 자기주장을 적절하게 드러내면서 이뤄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트렌드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을 뛰어넘을 순 없는 일이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듯 이상도 그에 맞게 진화되어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이 세상 역시 나에게 현실을 제대로 볼 기회를 준다. 옷을 만들면서 터득한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