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찬노숙' 신세, 현재 권력 대척점에 선 점은 한계
보수혁신 아이콘·차기 대권 주자 이미지는 '소득'
"'원내대표 유승민'의 시계는 멈췄다. 하지만 '정치인 유승민'의 시계는 빨라지고 있다." (새누리당 핵심당직자)
집권여당의 원내사령탑에서 8일 물러난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 돼 다음 총선의 공천권도 불확실해졌다는 우려부터 차기 대선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는 기대감이 엇갈린다.
당 역사상 처음으로 의원총회를 통해 불명예 퇴진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정치인 유승민'으로서는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있다. 실질적으로 집권여당의 원내사령탑에서 평당원으로 하루아침에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쳤지만 다음 대권까지 노릴 수 있는 무형의 정치적 성과를 얻었다는 분석이다.
특히 새누리당의 핵심 기반인 보수 지지층이 중시하는 '원칙'의 이미지를 쌓은데다 이번 사태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에 대항할 사실상 유일한 비주류의 선두주자로 올라섰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정치권에서는 "졌지만 이긴 것은 유승민"이라는 평가마저 나온다.
◆ 살아 있는 권력의 최대 정적 돼…친박의 집중 견제도 한계
유 전 원내대표가 당장 잃게 된 것은 원내사령탑이라는 자리가 가져다 주던 정치적 실익이다.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는 사실상 당내 서열 2위로 당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다. 특히 원내지도부에 대한 인사권을 잃게 된 점은 타격이다.
새누리당의 원내 관계자는 "정치적 입지가 오히려 확고해졌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그건 장기적인 얘기고 당장은 풍찬노숙(風餐露宿·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 신세가 된 것은 틀림없다"며 "정치라는 건 비정하다. 친박계가 핵심 비박계에게 다음 총선을 앞두고 좋은 자리(당직)를 제안하는 식으로 유 전 원내대표의 구심력을 계속 약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라는 '살아 있는 권력'과 정면 대립하면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힌 점도 부담으로 남게 됐다. 또 당의 갈등을 촉발시킨 불통 이미지가 더해진 점은 한계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로 전열을 정비한 친박계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게 돼 당분간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어려운 점으로 꼽힌다.
이에 내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을 지도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배신의 정치를 선거에서 심판해달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이 박 대통령의 확고한 지지기반인 대구 경북(TK)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친박계로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의원은 "전신인 한나라당까지 거슬러 올라가봐도 당내 소장파를 자처하던 의원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적은 없다"며 "지금 당장은 '유승민 후폭풍'이 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 정치적 영향력은 점점 약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 차기 대권 주자로 이미지 굳혀…보수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유 전 원내대표가 이번 사태로 상당한 정치적 내상을 입은 것은 분명하지만 차기 대권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무엇보다 '원칙 있는 정치인' '혁신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점은 큰 성과다. 김무성 대표 외에 별다른 뚜렷한 차기 대권주자가 없는 새누리당에서 대권주자로서의 이미지도 확실히 쌓았다.
또 보수를 혁신할 수 있는 가치와 철학, 정책까지 갖고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유 전 원내대표는 그동안 증세, 복지, 경제민주화,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등 주요 이슈에서 박 대통령과 명백히 다른 입장을 보여왔다. 지난 4월 유 전 원내대표가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 중부담-중복지 지향, 법인세 인상 가능성' 등을 언급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보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오히려 유 전 원내대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국민에게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됐다.
집권 후반기를 앞둔 박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평가가 인색해질수록 향후 박 대통령의 대척점에 서 있는 유 전 원내대표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치솟을 것이라는 점도 소득이다. 여권의 유력한 대권후보인 김무성 대표는 유 전 원내대표에 비해 박 대통령과 이미지가 겹치는 점이 많아 중도층을 공략할 수 있는 유 전 원내대표의 몸값은 오를 가능성이 높다.
'민주적 리더십'이라는 이미지를 얻은 점도 큰 성과다. 유 전 원내대표는 이날 사퇴 회견문에서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다"며 법과 원칙·정의를 언급했다. 특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며 보수 정치인에게서 듣기 어려웠던 말을 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정치적 확장성이 큰 인물을 여권에서 찾기 어렵게 됐다.
새정치연합 핵심관계자는 "야당 입장에서 가장 상대하기 싫고 두려운 유 전 원내대표가 차기 대권으로 가는 기반을 오늘 확실히 닦았다고 본다"며 "여당 지지층의 저변 확대 가능성, 혁신 보수의 아이콘, 확실한 정책 콘텐츠 등으로 무장한 유 전 원내대표가 긴 호흡으로 승부한다면 야당으로서도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계로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의원은 "비박계 의원들이 얼마나 길고 강하게 '유승민'이라는 구심점으로 똘똘 뭉쳐 정치세력화 하는 지가 정치인 유승민과 비박계의 운명을 가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의원은 "유 전 원내대표 사퇴로 실시될 예정인 원내대표 선출 과정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유 원내대표 '부활'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며 "비박계 인사가 원내대표나 정책위의장 등 주요 당직을 차지한다면 '유승민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