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노역을 했지만 '강제 노동'은 아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5일(현지 시각) 일본 산업혁명 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서 조선인 강제 노역 사실을 반영토록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결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임의적인 번역을 통해 이같이 '물타기'를 시도했다. 이는 "한·일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 만큼 선순환적 관계 발전의 계기가 될 것"(윤병세 외교부 장관)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한·일 간 신뢰 회복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병세 외교장관이 6일 국회 외통위 전체회의에 출석, 일본 메이지 산업 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 3월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5일 밤 유네스코 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노역자들이) 강제로 노역을 했다(forced to work)'는 일본 대표의 말이 '강제 노동'(forced labor)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일어판 번역문에서도 'forced to work'를 '일하게 됐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수동형 표현인 '하타라카사레타(�動かされた)'로 썼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강제성'에 말장난이나 물타기식 번역을 하고 나선 것은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책임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과 관련이 있다. '강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경우 법적 책임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즉 '강제 노동이 아니다'는 얘기는 "징용이 당시로선 합법적이었으며 따라서 징용 때문에 원치 않는 노동을 했다 해도 도의적으로 미안할 뿐 법적 책임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기시다 외무상은 기자회견에서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징용 등 모든 문제가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입장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이 같은 일본의 대응이 자국 내 보수적 여론을 의식한 것이라는 판단하에 정면 대응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정부 소식통은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유산 등재가 결정되던 순간 일본 대표단이 웃지도 않고, 박수도 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일본 정부가 왜 저렇게 나오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이번에 국제사회가 받아준 것은 (일본의 번역문이 아닌) 영문(英文)본"이라며 "일본이 자국 내에서 해석한 것을 갖고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일본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약속한 '강제 노역을 반영하는 안내 센터 설치' 등의 후속 조치를 제대로 이행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날 일본 측이 보여준 태도에 비춰볼 때 후속 조치 이행에도 만만치 않은 외교적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시설을 보유한 일본 지방정부나 기업체가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문에 따르면 일본은 2017년까지 이행 조치에 대한 경과 보고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해야 한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018년 회의에서 이를 점검하게 된다. 그러나 약속 이행을 점검할 구체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상당 부분 일본의 재량에 맡겨진 측면이 크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양심, 국제적 기준에 따라 알아서 해야 할 조치"라며 "일본 정부가 충실히 이행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박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