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현실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합집합을 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아일랜드 출신 영국 철학자 조지 버클리가 지적했듯, 인간의 모든 경험은 지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책상, 장미, 땅, 하늘. 그 어느 것도 감각과 뇌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인식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인간의 지각 능력을 경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나의 지각'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의 지각이 현실이라면, 타인의 지각 역시 현실일까? 우리 모두 각자 다른 현실을 느끼고, 바라보고, 기억한다면, 결국 무한으로 다양한 현실이 가능하지 않을까?

어렵기로 유명한 플라톤마저 '어두운 철학자'라며 어려워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기원전 5~6세기). '단일과 다수'(The One and the Many)라는 책에서 그는 '존재는 하나다' '존재는 그냥 존재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무슨 말일까? 인류는 오랜 시간 다양한 현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신, 인간, 동물, 식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들은 고유의 현실에 존재하기에 각자 다른 규칙을 따른다. 언젠가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신에겐 적용되지 않듯 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은 달랐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상상할 수도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우주엔 '변화'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느끼는 다수는 착각에 불과하며, 존재도, 현실도 결국 단 하나뿐이라는 말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VR)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AR)이 IT 세계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상현실 기술은 인식된 세상을 모두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짜 현실로 대체한다. 페이스북 오클러스(Oculus), 삼성 갤럭시 기어 VR, 소니 모피어스(Morpheus) 같은 현재 VR 시스템들은 여전히 완성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20년 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현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가상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할지도 모른다. 안전한 내 침대에 누워 지구를 구원하는 영웅이 되고, 현실에선 불가능한 모험을 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VR 기계를 끄는 순간 가상 세상은 사라지고, '자연현실'만 남는다. VR과 자연현실은 구별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증강현실은 다르다. 증강현실의 특징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과 자연적 현실이 혼합된다는 점이다. 최근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E3(Electronic Entertainment) 엑스포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자연현실'과 컴퓨터 게임을 혼합할 수 있는 '홀로렌즈'(HoloLens) 시스템을 소개한 바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좋아하는 게임 주인공들이 나의 거실에서 춤추고,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이동할 필요 없이 우리 집에 모여 파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연현실은 더 이상 인식되지 않도록 바꿔버리면 되고, 지저분하고 노후한 도시는 아름답고 깨끗한 건물로 인식되도록 증강시켜 버리면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현실은 단 하나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IT는 무한의 현실들이 평행으로 존재하는 조지 버클리 식의 세상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 인류는 더 이상 현실에서의 문제를 진정으로 풀려고 노력하는 대신,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믿고 싶은 현실만을 지각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