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진 특파원

3일 오전(현지 시각) 그리스 아테네 시내 아폴로노스 거리 부근의 한 초등학교. 선거 때마다 투표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5일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찬반(贊反) 국민투표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투표를 불과 48시간 앞두고도 이곳에선 투표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 주민 크리스티나(43)씨는 "투표가 일요일에 있다는 것 이외엔 관련 공보물 한 장 받은 게 없다"고 말했다.

5일 투표는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경제권) 잔류나 탈퇴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될 전망이다. 찬성(구제금융안 수용)이 많으면 유로존 잔류이지만, 반대(거부)가 많으면 탈퇴로 이어질 공산이 높아진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그리스 명운이 달린 투표"라고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투표를 할 만큼 그리스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투표가 다가올수록 찬반 의견은 팽팽하다. 3일 일간지 에트노스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선 '찬성'이 44.8%로 반대(43.4%)를 근소하게 앞섰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찬성파와 반대파가 마주쳤을 때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거나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결론이 나오더라도 투표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준비 안 된 선거에 국민 혼란

2일 아테네 시내엔 이번 투표와 관련해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선거를 사흘 앞두고 이날 처음으로 'NAI(네·예)'라고 적힌 포스터가 버스 정류장 광고에 나선 것이다. 국민 여론이 찬반으로 갈려 있는데도, 그동안 거리엔 정부 주도로 제작한 'OXI(오히·아니요)' 포스터만 있었다. 치프라스 총리가 지난달 27일 갑작스레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찬성' 진영은 미처 포스터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이러한 '부실 투표'는 그리스를 더욱 혼란으로 내몰고 있다. "전국적으로 투표를 진행할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곧 취소될 것" "정부가 통계 수치를 조작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매일 치프라스 총리가 나서 TV 연설과 트위터로 이런 소문에 해명하고 있다. '서양 민주주의의 발상지'였던 그리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찬·반 갈린 그리스, 길거리 논쟁 - 5일 그리스에서 국제 채권단의 그리스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찬반(贊反) 국민투표가 시행된다. 투표를 사흘 앞둔 2일 테살로니키 도심에서 찬성(NAI·그리스어로‘예’라는 뜻) 깃발을 든 장년 남성이 구제금융안 수용에 반대하는 청년들과 논쟁하고 있다.

찬성파와 반대파는 3일 막바지 선거운동에 열을 올렸다. 투표 하루 전인 4일은 공식 선거운동이 금지돼 있다. 이날 오후 정부가 지원하는 반대파 집회가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열렸다. 같은 시각 찬성파는 불과 500m 떨어진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으로 몰려들었다.

유권자들이 투표 당일 받아들 용지의 문안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IMF가 지난달 25일 유로그룹 회의에서 제안한 2가지로 구성된 구제금융안에 대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일반 유권자로서는 구체적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인 이아노스(49)씨는 "도대체 우릴 보고 무엇에 투표하라는 말이냐"며 "무조건 반대와 찬성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혼돈 속에서 극단주의 세력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일 오후 8시쯤 공산당의 상징인 '낫과 망치' 무늬가 새겨진 붉은 깃발 수백개가 신타그마 광장을 에워쌌다. 5000여명의 공산당원이 모여 "공산주의 시스템이 그리스 경제 위기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의대생 니코스(25)씨는 "그리스가 유럽연합 안에 남아 있는다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며 "우리는 EU를 탈퇴한 뒤 계급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식당 종업원 아드리아나(52)씨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사실 저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잘 모른다"며 "투표에서 국제 채권단이 제시한 긴축안과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해법이 각각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가늠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IMF "그리스 부채 탕감" 보고서 파문

선거 막판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보고서도 그리스 여론을 출렁이게 했다. IMF는 2일 "그리스의 금융 안정을 위해 2018년까지 3년 동안 600억유로(약 75조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며 "그리스가 빚 문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부채 탕감과 만기 연장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스에 "숨 쉴 공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치프라스 총리가 협상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내용과 비슷하다. 따라서 국민투표 후 협상이 재개된다면, 채권단과 그리스가 부채 탕감에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 보고서의 작성 시점은 막바지 협상이 진행 중이던 지난달 26일이었다. 이를 일주일이나 지나 공개한 것에 대해 가디언은 "2010년(1차 구제금융 제공 때) 그리스에 대한 부채 탕감을 시행했어야 했던 점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투표 이후 그리스 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그리스 상공회의소의 미카로스 회장은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지금 그리스 시중은행에 남아 있는 현금이 5억유로(약 6200억원)에 불과하다고 들었다"며 "지금 상태로 국민투표 후 은행 문을 열면 한 시간도 안 돼 현금이 바닥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영업 금지 조치 대신 지난달 29일부터 무료 개방했던 대중교통은 연료를 아끼기 위해 운행 횟수를줄이고 있다. 수퍼마켓에서는 여전히 식품 사재기가 벌어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해외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이 고국에 남은 가족을 위해 생필품을 인터넷에서 구매해 배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상업연합회의 코르키디스 회장은 "현금 부족으로 결제가 가능한지 서로 믿지 못해 도·소매 간 거래가 마비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