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파리 특파원

지난 24일 오후 7시(현지 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난 유럽연합(EU) 정상들의 만찬은 이튿날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저녁식사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더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새소리도 들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평소 EU 정상회의는 늦게 끝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저녁을 곁들인 회의를 '끝장 만찬(never-ending dinner)'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특히 이번 회의는 그리스 구제금융처럼 풀기 어려운 숙제들이 정상들의 진을 뺐다.

쪽잠을 자고 25일 오전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선 정상들 앞에 예기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프랑스의 한 가스 공장에 자동차를 몰고 들어가 폭발을 일으키고, 참수된 시신이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뉴스였다. 당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와 그리스 구제금융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올랑드와 메르켈은 함께 TV를 켜 테러 현장을 지켜봤다. 올랑드는 회의 일정을 중단하고 급히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캐머런은 이날 영국이 EU를 탈퇴하지 않도록 하려면 EU 협약을 개정해야 한다며 정상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이때 튀니지에서 외국인 여행객을 상대로 한 테러가 발생했으며, 피해자 다수가 영국인이라는 보고가 캐머런에게 전해졌다. 캐머런도 결국 귀국 후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했다.

25일 정상회의에서 목소리가 가장 컸던 사람은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였다. 그는 "몰려드는 북아프리카 난민들을 왜 우리만 책임져야 하느냐"며 '난민 국가별 분산 정책'에 반대하는 헝가리·체코 총리를 몰아붙였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아무 준비도 없이 난민을 분산시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깝다"며 맞받았다.

이틀간의 회의에는 현재 유럽이 당면한 절박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의제(議題)로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난민과 과격 이슬람주의자의 테러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위기의 퍼펙트 스톰(강력한 폭풍)'이 유럽을 덮쳤다"(영국 일간지 가디언)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상황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추구해 온 '하나의 유럽'이라는 거대한 실험이 성패(成敗)의 변곡점에 놓여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대륙의 통일은 지금까지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샤를마뉴 대제(8~9세기)와 나폴레옹 1세(19세기)의 유럽 통일도 '칼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은 문서(EU 협약)와 화폐(유로화)로 유럽 통일이라는 이상(理想)에 도전하고 있다.

EU는 그동안 인권을 앞세워 이민자에 대한 차별의 장벽을 낮춰왔다. 경제 권력은 유럽중앙은행(ECB)과 EU집행위원회, 사법 권력은 유럽사법재판소(ECJ)에 넘기는 중이다. 지금 EU가 마주하는 문제들은 이런 이상에 도전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리스의 부실을 알고도 이를 못 본 척 2001년 그리스를 유로존에 받아들인 안일함에 대한 비용이기도 하다. 외교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EU의 이런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