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현 의원(54)은 얘깃거리가 참 많은 사람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위였고, 지금은 재벌가(롯데)의 사위다. 친박 인사 중 핵심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고, '실세'로까지 불린다.

워낙 정평이 나 있다. 부지런한 걸로 둘째가라면 서럽지 싶다. 어떨 때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출근한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도 '열심히 한다'다. 실제로 일도 많이 했다.

정당 대변인부터 원내수석부대표, 사무총장 등 여러 직책을 지내왔다. 지금은 대통령 정무특보를 겸하고 있다. 대통령 정무특보는 쉽게 말해 대통령 직통 라인이다. 어렵게 말하면? "국정과제를 풀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동력인 민심을 청와대와 정부에 전하는 것"이다. 의원직 하나만 해도 힘든 걸, 두 개씩이나 하고 있다.

최근 정무특보도 겸하고 계신데, 힘들지 않으세요? 일 많죠. 많아요. 근데 일이 많은 게 좋아요. (일이) 없으면 오히려 다운되더라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걸 좋아해요. 대통령께서 어떤 직분을 주든지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겸직 논란이 아직 안 가셨는데요? 사실 정무특보란 게 민심, 당심, 이런 걸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렇다 할 역할을 하는 게 아니에요. 곧 정의화 국회의장이 현직 의원의 대통령 정무특보 겸직 허용 여부에 대해 발표할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워낙 각별하죠? 신뢰를 받게 된 계기가 뭡니까?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게 2002년 8월 8일 재보궐선거 때예요. 그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힘없는, 그야말로 '비주류'였어요. 그해 제가 공천에서 떨어졌는데, 박근혜 당시 당 대표께서 "우리 윤 박사, 내가 힘이 없어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라면서 점심을 사줬어요. 그때부터 인연을 맺은 거죠. 대통령이 절 좋아하시는 건 의리, 신의 때문 아닌가 싶어요. 그 이후로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20112년 대선 때도 계속 의리를 지켰으니까.  

한때 술 한잔 하면 박 대통령을 '누나'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진짭니까?
에이, 아니에요. 한 번도,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 없어요. 연도에 따라 후보님, 대표님, 대통령님…. 꼬박꼬박 이렇게 불렀죠.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누나라고 부릅니까.
근데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요? 가십이에요. 부풀려지고 포장된. 제가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회장과 오랫동안 친분이 있으니 그렇게 어떤 구도를 짜내서 말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대통령과 저 10살 차이예요. 저는 대통령을 누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혹시 '누나'가 아니라 '누님'이라 부른 거 아닙니까? …. 네. 딱 한 번. 예. 술 마시고. '누님!' 딱 한 번 그랬습니다.
호칭설은 '누님, 한 번'으로 정리하고요. 옆에서 본 박근혜 대통령. 어떤 분인가요? 내공이 엄청난 분이죠. 한나라당 대표 때부터 지금까지 위기나 어려움이 많았는데, 위기 때 더 두드러지는 분입니다.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시지 않아요. 이유도 따지지 않으세요. 한번은 "국민을 어떻게 하면 잘살게 하느냐는 생각 외에는 다 번뇌다"라고도 했어요. 그러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늘 아픈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현 정부 출범 이래 국정운영 동력을 발휘해나가기가 참 쉽지 않네요. 2013년 첫해부터 3년 차인 올해까지 국정원 댓글 수사, 세월호 참사, 그리고 지금의 메르스 사태까지 큰 사건 사고가 이어지면서 어려움이 그치질 않고 있어요. 더 혼신의 노력을 해야죠. 바람 불고 물이 마르면, 방풍막 치고 우물을 뚫어야죠. 어려운 도전들을 이겨나가면 다른 기회들이 있을 겁니다.

윤상현은 실세다, 맞습니까? 2013년부터 지난해 사이 야당에서 너무 과도하게 띄워줬어요. 그때 실세다 뭐다 하며 여러가지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고요.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운데, 좀 과하지 않나 싶어요. 당시 여러 현안에 대해 자주 브리핑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어느 날 아침 신문에 보도된 걸 이전에 누적돼 있던 기사들과 비교 분석하고 정리해서 얘기를 했더니 "어~ 그런 고급정보를 어디서 얻었느냐. 역시 실세라 다르다"는 겁니다. 신문기사를 종합해보면 나오는 얘기인데 말입니다.

# 무연고 인천, 폭탄주의 힘

가난한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근무처가 바뀔 때마다 전학을 가야 해서 초등학교를 세 곳이나 다녔다. 떠돌이 생활에 익숙해야 했다. 충남 청양에서 경기도 수원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대전으로 내려갔고, 여기서 또 평택으로, 그리고 서울로 옮겼다. 그는 “이런 유목민 같은 생활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서도 잘 적응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적응력을 키워줬다”고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줄 알았는데요? 그 시절엔 모든 게 부족했어요. 가난한 나라였고, 지금처럼 가정들 간 생활 차이도 크지 않았어요. 딱지 접을 종이가 귀해서, 오래된 월간잡지 하나도 함부로 하지 못했었죠. 지금은 재활용 시간에 그 귀하던 포장상자가 쏟아져 나오잖아요? 그땐 빈 상자 하나도 유용한 생활물품이었죠. 빈 깡통 차고 놀고, 구슬치기로 나름 유리알 재산을 불리던 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교수가 꿈이라고 들었는데, 어떡하다 정계에 발 디디게 됐습니까? 어릴 땐 축구선수가 꿈이었고, 커서 교수를 꿈꿨죠. 한때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외교관도 꿈꿨었고. 어쨌든 일단 학문으로 가서 국제정치학도가 돼야겠다 해서 교직생활도 하고 그랬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 한 2년 반 정도 있었고요. 1997년부터 98, 99, 2000년까지. 근데 묘했어요. 학생들이랑 공부하고, 운동도 하고, 맥주도 한잔 하는 형님 같은 교수를 꿈꿨는데, 정작 대학은 그런 곳이 안 되더라고요. 현실이 그렇더라고. 학교에서 맞닥뜨리는 교수들을 보면서, 야~ 내가 생각하는 그런 교수는 될 수 없는 환경이구나….

서로 시기 질투해서요? 에이,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순 없잖아요.
아뇨, 말을 아껴도 아마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걸요.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교수상을 구현하려고 했는데, 막상 교수사회라는 게, 시기도 그렇고 갈등이 많더라고요.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해결은 정치가 아닌가 싶어서 노크하게 됐죠. 

이회창 총재와의 인연이 정치 입문 계기였죠? 1998년부터 당시 이회창 총재께 외교안보 쪽 자문을 드렸어요. 그때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로 있었거든요. 그러다 2000년도에 공천 받아서 동작을에 나가려고 했었죠. 결국  해프닝 때문에 못했고. 이후 2002년 8월 8일에 재보궐선거가 있었어요. 그때 경기 하남에 한 3개월 정도 들어가서 활동했었거든요? 당시 13명이 공천경쟁을 했는데, 제가 공천 1순위로 들어갔어요.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순위 3위인 김황식 후보에게 (공천을) 줬어요.
그때 생각했죠. 우리나라에 지역구가 2백40~2백50개가 있다고 하면 일개 지역구가 아니라 전체 지역구를 가지고 정치를 하자, 당의 결정에 승복하자고요. 되레 김황식 씨를 열심히 도와줬고, 김황식 후보가 결국 당선됐죠. 그랬더니 총재께서 저를 치켜세우더라고. 대단하다고. 그러면서 널 내 특보로 삼겠다고 한 거예요. 정책특보로(2002).

지금은 연고도 없는 인천에 가 계시죠? 인천엔 학연, 지연, 혈연 아무것도 없었어요. 혈혈단신 윤상현. 인천에 연고를 깨러 들어갔던 거예요, 애초에. 소지역주의를 깨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럼으로써 나만의 정책 아이덴티티를 찾겠다는 신념이 있었죠. 2003년 최병렬 대표 체제 땐데, 그때 지역구가 5개 비어 있었어요. 그중에 인천도 있었고요. 최 대표가 저한테 서울 내 지역구 줄 테니까 지구당위원장 맡으라고 했었습니다. 거절했어요. 강재섭 전 대표는 대구에 오라고도 했어요. (저희 어머니 고향이고, 전(前) 장인도 대구니까) 쉽게 될 거라고. 근데 인천이 더 끌렸어요. 잠재력이 있는 도시더라고. 오로지 내 역량을 가지고 심판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의 그림자 파먹는 정치는 안 하고 싶었어요. 들어가자마자는 또 지구당의원 경선을 하래요. 그래서 현지 사람들이랑 경선했고, 지구당위원장까지 됐어요.

이야~ 그게 가능합니까? 역량도 역량이지만, 매일 밤 술을 마셨더니 가능하더라고요. 폭탄주, 폭탄주의 산물이랄까. 하하.
아니, 거기 원래 위원장이 있었을 거 아녜요.  있었다가 나갔죠. 그래서 공모를 한 거예요.

굉장히 불리했을 텐데? 그러니까 만날 밤마다 사람들 만나고, 소통하고, 폭탄주도 마시고. 그러면서 가장 밑바닥부터 훑은 거죠. 속된 말로.
인천 사람이 다 됐겠네요? 이제는 완전히 인천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아마 저만큼 지역 구석구석을 휩쓸고 다닌 정치인이 없을 겁니다. 웬만한 골목길이면 어디에 짱돌 튀어나와 있는지도 알아요.

정치하신 지난 13년 동안, 이건 진짜 잘했다 싶은 건요? 지역구인 인천 남구(을)에 온 거요. 인천은 충청도 사람도 많고, 전라도 사람도 많고, 경상도 사람도 많아요. 전국이 다 들어가 있죠. 대선 때 박 대통령 득표율이 51.6%였는데, 이게 인천 내 박 대통령 투표율이랑 소수점까지 똑같아요. 인천이 완전 바로미터란 거죠. 전국을 모아놓은 도시니까. 인천에서 정치 시작하길 참 잘했다, 싶어요. 그리고 몇 번의 패배를 맛본 거. 처음부터 선거에 붙었으면 너무 건방져 졌을 것 같아요. 젊은 나이에 배지부터 먼저 달았으면요. 성경 '욥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정금같이 단련시키기 위해서 시련을 주신다고. 거듭 패배하면서 지역 주민이랑 더 열심히 소통하고, 비빌 수 있게 됐죠. 실제로 주민의 소망이나 민원을 더 잘 알게 됐어요. 이를 통해서 정치를 해야 더 크게 나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어쨌든 결국 폭탄주가 윤상현을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건 맞아요. 정치에 있어서, 참으로 젊은 세대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얘기지만 대한민국 현실 정치에서는 반은 인간관계고, 인간관계의 반 이상은 술인 것 같아요.
제가 서울대 있을 때 김학준 선생님이 세 가지를 하라고 했어요. 첫째, 마셔라. 둘째, 사랑하라. 셋째, 공부하라. 정말 술이라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의 윤활유예요. 특히 폭탄주는 우리 정치인, 언론인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죠.
그럼요, 문화죠. 소통하는 데 빠질 수 없는.(웃음) 폭탄주 덕분에 연고도 없는 지역구에서 살아남았죠. 확실히 윤활유가 됐어요.

여의도 마당발로도 불리잖습니까? 워낙 당, 이념 같은 거 안 따지고, 지역도 안 따지니까요. 사람 만나는데 빼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요? 그냥 화통하게 만나는 거죠.
의외의 인맥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은데요. 와, 이 사람이랑도 친해? 이런 거요. 인맥…이라기보다 적을 안 만드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2013년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됐을 당시 제가 원내 수석부대표였어요. 체포안 표결 협상을 제가 주도했단 말이죠. 새누리당 한 의원은 "저런 X하고 악수도 하기 싫다"고 그랬어요. 유일하게 제가 이 의원한테 악수를 청했어요. 이념보다는 사람이 먼저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같은 해 태어난 동시대 정치인인데, 이념이 달라 이렇게 됐다고. 그러면서 말했죠. 역사의 아픔이라고.

정치한 거 후회는 안 하십니까? 후회 안 해요. 한 적 없어요.
정치판 떠나고 싶단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요? 힘들다고 떠나면 세상에 머물 곳이 어딨습니까? 대변인부터 원내수석부대표, 사무총장 등 여러 직책을 지내왔지만, 그게 각기 다른 의미에서 모두 다 어렵고 고된 자리들이에요. 가장 힘든 순간은 바로 그것을 하고 있을 때죠. 지내놓고 나면, 그 힘겹던 때들도 역시 기억의 한 갈피에 남겨지고 흐릿해지고 여운으로 흩어지죠. 그리고 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힘들거나 쉬움의 무게보다는 다를 뿐이에요.

# 이혼, 재혼 그리고 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윤상현 의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녀 전효선 씨(현 서경대 교수)와 지난 1985년 결혼했다. 슬하엔 두 딸을 뒀다. 그러다 지난 2005년 전격 이혼했다. 직후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막냇동생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딸 신경아 씨와 화촉을 밝혔다. 전 대통령의 사위였다가, 재벌가의 사위가 된 것.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혼사를 두 번이나 치른 셈이다. 특히 전 씨와의 이혼은 한동안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정치 야욕을 위해 이혼했다는 질타였다. 한 번도 해명하려 하지 않던 그지만, ‘굳이’ 질문을 하자, 그제야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에 아드님이 정치를 하겠다고 하면? 글쎄요, 아들이 없어서….
아니, 아들이 왜 없어요. 아들 없어요. 딸이에요.

이번에도 딸? 딸만 셋이죠.(웃음) 어쨌든 아들이든 딸이든 정치한다고 하면? 자기 뜻대로 하도록 할 거예요. 원하는 걸 하게 해줘야 해요. 미술이면 미술, 뭐 정치를 하려면 정치….

첫사랑은 몇 학년 때였어요? 첫 번째 부인이 첫사랑이었어요. 19살, 고3 때. 고3 졸업하기 전에 학력고사 끝나고 바로 그다음 달부터 프랑스 어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만나서 사귀게 됐죠.

그게 몇 년도였죠? 1981년 1월이었어요. 그때가. 
그때 이미 대통령의 따님이셨네? 아니죠. 3월에 대통령에 당선되셨으니까.
그럼 대통령의 딸이 될지 모르고 사귀었던 건가요? 그때는 몰랐죠. 3월에 알았어요. 물론 그전에 오다가다 어렴풋이 알았을 수도 있죠. 정확히 안 건 3~4월 이때였어요.
누가 누구를 더 사랑했나요? 원래 남녀 간에는 누가 더 사랑하고 그런 게 있잖아요. 그 사람하고 편지를 주고받은 게 한 3백 통 돼요. 근데 그 사람이 더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그렇죠. 원래 그런 건 여자가 더 많이 쓰죠.(웃음) 근데 왜 헤어졌어요? (그쪽에) 예의가 아니니까요. 그 얘기는 좀….
세간에서 이혼을 먼저 요구하셨다는 얘기도 들리니까. 그렇게 알려져 있죠. 그런데 그 반대예요. 1997년도였어요. 이혼을 하재요. 안 된다고 했어요. 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이혼을 하느냐고. 얼마 뒤에 전 장인(전두환 전 대통령)이 절 불러요. 미안한데, 내 딸이랑 이혼 좀 해줘라, 그래요. 안 된다고 했어요. 이혼만은 안 된다. 전 부인에게 그럼 그냥 떨어져서 편하게 살자, 이렇게 말했어요. 별거에 들어간 거죠. 그렇게 2003년이 됐는데, 전 장인이 또 부르셔서 갔더니 "너 이혼하는 게 낫겠다. 전재용이 사건이 터졌다. 너 이혼 안 하면 무조건 떨어진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했어요. 괜찮습니다. 아버님의 십자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혼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2004년 선거에 나갔고, 떨어졌잖아요. 남들은 누구 때문에 떨어졌다, 그러는데 그건 제 업보죠.

그럼 별거를 10년 동안 한 겁니까?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네. 그사이에도 죽어도 이혼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냥 떨어져 살면 된다고. 근데도 끊임없이 제발 이혼해달래요. 그래서 말했어요. 우리 부모님, 애들 동의를 구해라, 그러면 이혼해주겠다. 애들(전 부인 사이에서의 딸 둘)이 다 크고, 동의를 구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반대하셨어요, 이혼을? 애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신의를 지키고 싶었어요. 장인과의 신의요. 남자로서의. 이혼하고도 장인어른께 찾아 갔어요. 아내랑 같이 인사드리러. 큰절 드리고, 결혼식에도 오시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날 일이 있어서 못 가지만, 윤 서방 너는 내 아들이다. 자식처럼 생각하니까 잘 살으라, 하셨습니다.
전 대통령과 지금도 연락하십니까? 지금도요, 네. 연락하고 지내요. 전 장인께 아들이 셋 있어요.

(전) 처남들 이죠? 그렇죠. 그중 막내 같은 경우는 지금 미국에 있는데, 올 때마다 만나요. 두 달에 한 번씩 꼭 만나고 큰 처남도 가끔 봐요. 서로 도와주고.

지금의 아내는 어떻게 만났어요? 장모님하고 어떻게 인연이 돼서 알게 됐어요.
어떤 사람입니까? 되게 순종적이에요. 나서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죠. 순수하고요. 제 집사람이 불자예요. 아주 독실한 불자예요. 20년 동안 안국선원을 다녀요. 그러니까 제가 집에 늦게 들어가도 항상 참선하고 그래요. 저하고 잘 맞아요.
의원님은 종교가? 기독교예요.

기독교랑 불교가 같은 집에서 사는 거네요, 이거 굉장히 재밌네요. 각자 종교를 가지고 사는 거죠. 아내 덕분에 사찰도 같이 다녀보고 그래서 스님도 많이 알아요.
그럼 주일에 의원님은 교회 가고, 사모님은 절로 가고? 하하하. 그렇죠. 그런 셈이죠. 그 사람은 굳이 일요일이라기보다 법회 때, 네.

전도할 생각은 없으시고요? 교회에 몇 번 데리고 갔는데, 그게 안 맞대요. 절이 맞대요. 저는 또 나름대로 기독교회의 감리교 권사기 때문에…. 집사람은 20년 불자, 전 기독교감리교 권사.

딸 얘기 좀 해주세요. 6살짜리 딸이 있어요. 동물농장을 좋아해서 집에 갈 때마다 동물인형을 하나씩 사다줘요.  최근에는 표범 사다줬고요, 얼마 전엔 사슴. 조그만 인형인데, 요만한. 딸이 집에다가 그 인형들 가지고 동물농장을 만들고 있어요.
누구 닮았어요? 주변에서 아빠를 많이 닮았대요.

윤상현의 인생철학은 무엇인가요? 진인사대 천명(盡人事待天命).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대천명(待天命). 하늘의 명을 기다려라.
사랑에 대한 철학은? 이게 바로 사랑이다, 이런 거. 상대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느껴지는 것. 그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픈 것. 그게 사랑인 것 같아요.

(지금 아내가) 그렇게 느껴졌나요? 그럼요. 그렇게 느껴졌으니까 결혼했죠.

마지막 질문. 종국적으로 꾀하는 바가 뭡니까.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책에 빗대어 얘길하자면, 제가 최인호 선생을 참 좋아해요. , 감명 깊게 봤는데, 특히 좋아하는 책이 예요. 인삼장수 얘긴데, 여기서 말하는 상도가 뭐냐. 상즉인(商卽人). 사람이란 거거든요. '호설암'이라는 청나라 거상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뭐라고 했냐면 '견리사의(見利思義)'라고 했어요. 이익을 볼 땐 의를 따지란 말이거든요. 또 옛날에 소부는 유근이나, 거부는 유천이다라는 말도 있죠. 작은 부자는 근면하면 되는데, 큰 부자는 하늘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결국 여기서 '하늘'이 뭐예요. 의(義)고, 인간이에요.
정치에도 '정도(政道)'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정도가 뭐냐, 정즉인(政卽人)이라는 겁니다. 휴머니티죠. 정치하는 사람들 머리 많이 굴리잖아요? 이해관계 때문에. 근데 그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정치를 하고 싶어요. 뛰어넘으려면 뭐가 필요하냐. 인간성. 휴머니티예요. 휴머니티에 곡진할 때 비로소 정도(政道)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예요. 이걸 한 번 구현해보려는 게 제가 여기서 꾀하는 겁니다. 제 꿈이기도 하고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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