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암초를 만났다. 협상에 꼭 필요한 관련 법안을 연방하원이 12일(현지 시각) 부결시켰다. 일본·멕시코·호주 등 11개국과의 다자간(多者間)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무역·경제의 규범을 만들어 중국을 견제하려던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전략에 차질이 빚어졌다. 중국은 최근 한국 영국 등을 포함해 60개국 가까이 참여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해 국제금융 주도권을 넘보고 있다.
하지만 TPP 1차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TPP 타결이 늦춰지는 게 나쁘지 않다는 분석이다. 양자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우리가 가장 앞서 있지만, 미국과 일본이 TPP를 타결지으면 자동차나 중간재 교역에서 상당한 피해를 볼 수 있다. 한국은 최대한 빨리 TPP에 가입한다는 입장이나, 12개국이 정해놓은 룰에 맞춰야 하고, 추가 협상 과정에서 농축수산업 부문의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있어, 미국 내부 변수에 따른 협상 진전 여부가 관심이다.
민주당은 이날 대통령에게 무역협상의 전권을 위임하는 '무역협상촉진권한(TPA)'을 무력화했다. TPA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중요한 이유는 최종 협상 내용을 의회가 수정하지 못하고 찬·반 표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껏 협상을 해서 결과를 내놓았는데, 미국 의회가 내용을 바꾸면 협상 상대국으로서는 낭패다. 그래서 일본 등은 미국 측에 TPA가 있어야 협상을 계속할 수 있다고 압박했었다. 이번 법안 부결은 쌀시장 개방 등 민감한 현안까지 거의 협상이 끝난 TPP에 직격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프라이스 전 백악관 경제고문은 "빨리 긍정적인 표결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협상 당사국들이 미국 의회가 협상안을 수정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다시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부결 사태를 여당인 민주당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18개월가량 남은 오바마 대통령의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 이유에 대해 "TPP 체결로 지역구 내 일자리를 아시아에 뺏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라며 "TPP에 찬성했다가는 다음 선거에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노조가 집요하게 반대 로비를 한 것도 한 원인이다.
공화당 소속 존 베이너 하원 의장은 16일 재투표를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단시간 내에 의원들의 생각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하원이 이번 회기 중에 무역 관련 법안을 처리하지 않으면, 7월 말까지 TPP 협상을 마치고 연말에 의회 비준을 받아 자신의 업적 중 하나로 내세우려던 오바마 대통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결 즉시 성명을 내고 "더 많은 중산층 미국인 노동자가 성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의회가 바로 처리해달라"며 "글로벌 경제 규칙을 중국이 아닌 미국이 써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가 넘어가면 더 힘들다. 미국은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고, 유력 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TPP에 호의적이지 않다. 브랜든 로팅거스 휴스턴대학 교수는 "무역법안이 실패하면 레임덕이 아니라 (권력을 아예 쓸 수 없는) '데드덕(dead duck)'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TPP(Trans-Pacific Partnershi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멕시코·싱가포르 등 태평양 연안 12개국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 상품은 기본이고, 지식재산권, 노동·환경, 서비스, 투자 등 29개 분야에서 관세장벽 철폐를 추진하고 있다. 12개국의 국내총생산이 세계 경제의 37%(28조 달러)를 차지해 유럽연합보다 규모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