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1951년 4월이에요. 여기는 동대문시장인데 곡사포(曲射砲)가 쏘아대는 거예요. 폐허의 벽돌 더미 속에서 인간이 쥐새끼처럼 꾸물거리는 거죠."

목에 수건을 걸친 오태석(75) 선생은 배경 설명을 하고는 습관처럼 "흥흥흥" 웃었다. 곧 무대로 고개를 돌려 "자, 간다" 하고 외쳤다. '한강은 흐른다'(동랑 유치진의 1958년 작품)의 리허설 시작 신호였다.

세상 사람들은 영화감독 임권택은 알고 예능 PD 누구도 알지만, 연극계 거장(巨匠)인 오태석은 잘 모른다. 연극 장르의 숙명일지 모른다. 한 시간 반 리허설 동안 그는 쉴 새 없이 백지에 지적 사항을 메모했다. 가끔 어떤 장면에서는 딸보다 더 어린 배우를 향해 고함을 꽥 지르기도 했다.

"석 달째 이렇게 연습하고 있어요. 오후 1시에 시작해 대략 밤 10시쯤 끝나지요."

오태석 선생은 “감옥소 소장처럼 단원들이 허구의 세계에만 머물도록 주문한다”고 말했다.

―같은 대본(臺本)이고 다 아는 내용인데, 어제 연습했던 걸 오늘 하고 내일도 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 셈이군요. 이런 반복 행위가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는 없고요?

"로런스 올리비에(1907~1989년·영국 배우)는 평생 셰익스피어 연극을 해왔지만 말년에 '리어왕'을 맡아서도 대본집을 더듬고 있었어요. 같은 연극도 할 때마다 다르고 고쳐지는 거죠. 우리가 사는 현실은 딱 짜여 있지만 허구(虛構)의 세계는 매번 달라져요. 막(幕)이 내려오면 그 안에 있는 허구는 다 없어지고 다시 시작하는 거죠."

―한판 하고 끝나는, 재생(再生)되지 않는 그런 '일회성'의 허무함은 없습니까?

"흥흥흥, 그러면 인생도 한판이죠. 연극은 공연마다 달라지는 그런 생생함이 있지요. 막이 내리면 내가 정말 담아줘야 할 걸 관객에게 줬나, 그만한 물건은 됐나 하는 생각을 하지요."

―이번 '한강은 흐른다'에서는 무얼 주고 싶은 거죠?

"배우들은 팔 하나씩 없어요. 팔이 둘이었는데 휴전(休戰)한 뒤로 우리는 팔 하나로 견뎌왔어요. 용케도 잘 견뎌왔지만, 그 잃어버린 팔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거죠."

―선생의 부친께서 6·25 때 납북됐다고 들었습니다만.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아버지는 경무대(청와대) 법무관이었어요. 집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친구들이 "네 아버지 잡혀간다"는 거예요. 인민군들이 아버지를 담벼락에 밀어붙인 채 총을 들이대고 있었고, 군용 지프에 태우고 갔어요.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제가 열한 살 어린 나이였는데도 '세상이 여반장(如反掌·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시에 모든 게 바뀌었으니. 그 뒤로 남들이 요만한 마스크(가면)를 썼다면 나는 열 개쯤 마스크를 썼을 겁니다."

―어떤 종류의 '마스크'입니까?

"세상에 내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마스크입니다.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듣지 않기 위해서도 꾸몄고. 영악한 거죠. 그게 어쩌면 연극배우인지 모르죠."

―연세대 철학과 재학 시절 '담배를 얻어피우고 숙식 해결을 위해' 연극반에 들어갔지만, 평생 직업이 된 걸 보면 잘 맞았던 모양이군요.

"지겨웠으면 안 했겠지요. 연극은 '허구'이니까, 그 속에서는 내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드러내도 허구로 아니까 안심할 수 있는 거죠."

―연극판에서 살다 보면 자신의 성격과 스타일도 바뀌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전하다'는 말을 좋아해요. 열한 살 때 완벽하게 뒤집히는 것을 봤기에 절대 허뜨려지지 않죠. 젊은 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물론 실수도 있었지만. 저는 어느 선 안에서만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편안해요. 끝까지 믿음을 다 주지는 않아요."

―나이가 들면서 부친의 행방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대학 시절 친구 하숙방을 전전하는 나를 누군가가 찾아왔어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생각부터 들었어요. 서대문서 정보과 형사였어요. '마음 상하게 듣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접촉해온 적이 없나?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했어요. 또 한 번은 저녁 골목에서 사내들이 갑자기 내 팔짱을 끼고 잡아가다가 '착오가 있었다'며 풀어준 적도 있었어요. 그러니 아버지 행방을 알아보겠다는 생각은 엄두가 안 났지요."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아버지와 연결돼서는 안 된다는 내적 억압이 있었겠군요.

"연좌제(緣坐制)도 있었고, 당시 사회가 아버지를 '기피 인물'로 만들더군요. 제 막냇동생은 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신원 조회에서 떨어졌어요. 그때 결단을 내리고 부친 실종계를 냈어요. 3년이 지나 사망 처리가 됐고요. 뒷날 모친을 묻을 때 빈 관(棺) 하나를 같이 묻었어요. 나중에 북한 흙이라도 뿌려줄 계획인데 내가 지켜낼지 모르겠네요."

연습실에서 필자, 출연배우 전무송, 오태석(왼쪽부터).

―선생은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해왔는데 배우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나요?

"흥흥흥, 내 콤플렉스를…. 어쩔 수 없이 '땜방'으로 무대에 몇 번 서봤지만. 11살 때 충격이 없었다면 배우로 나설 수 있었을까. 배우가 못 된 것 때문에 지금까지 연극판에 있는지 모르지요."

―연극에 50년을 몸담았는데, 근본적인 회의가 든 적은 없었나요?

"서양 연극이란 액자 안에서 배우가 하는 걸 구멍을 뚫어 지켜보는 형식에다 남의 역사와 문화가 배경이니까, 맨날 연극을 해도 남의 다리를 긁어주는 것 같았어요. 그만둘까 하다가 정부 돈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연수를 간 거죠. 거기서 연극이 서양의 것만이 아니다, 산대놀이·판소리도 연극이라는 걸 알았어요. 순간 '미국 재벌 록펠러보다 내가 더 부자다'고 외쳤어요. 내 창고는 허름하고 기둥은 무너져있지만 그걸 열면 연극을 할 게 넘쳐있다는 거죠."

그는 '초분' '태' '춘풍의 처' '자전거' '부자유친'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만파식적' '용호상박' '백년언약' 등 작품 60여편을 쓰고 연출했다. 전통극 양식을 도입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실험적 작품이 많았다.

―선생의 대표작으로는 '초분'과 '태(胎)'를 꼽는데.

"남들이 그렇게 보는 거지, 그때는 너무 어렸죠. 미숙했고. 사실 내 대표작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어요. 흥흥흥. 앞으로 있지요."

―선생의 연극에도 객석이 빌 때가 있지요?

"7할은 객석이 비지요. 관객을 잡아끌고 올 수도 없고. 보통 공연 전에 배우 서른 명이 여섯 달간 연습을 해요. '부자유친'이라는 작품에는 어느 날 관객이 4명밖에 안 들었어요."

―환불해주고 '오늘 쉽니다' 할 수도 있겠지요.

"4명 중 한 명이라도 중간에 안 나가도록 최선을 다해보자고 했지요. 그날 저녁 배우들과 '그래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좋은 공연을 했지 않느냐'며 소주병을 깠죠."

―극단을 꾸려가려면 흥행이 되는 작품을 올려야 하겠군요.

"몇 년 전 숨진 조셉 팝은 브로드웨이 뮤지컬계에서 흥행의 제왕이었지요. 하지만 그도 연극 극장 6개를 운영하는 데 매표구 의존도가 17%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모두 후원을 받아요.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도 그런데, 우리는 그런 후원이 거의 없으니 오직 17%로 똑같이 쪼개먹는 거예요. 단원 아이들 월급은 지하철 차비밖에 안 되죠."

―TV나 영화에서 활동하는 박영규, 유해진, 김응수, 성지루, 손병호 등이 제자인 걸로 아는데, 어떤 마음이 드나요?

"한번씩 와서 저녁이나 사라고 해요. 이들은 공연 때 몰래 와서 보고는 그냥 가요.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

―선생께서도 영화나 드라마 연출을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1975년 극단을 맡으면서 책임을 져야 했으니 한눈팔 수가 없었어요. 단원 26명을 붙잡고 있으면서 이들이 선택한 길이 옳다고 믿게 해줘야 하니까요. 단원들에게 '가능하면 현실에 노출되는 시간은 줄이고 허구의 세계에 머물려야 한다'고 주문하죠. 연극 연습에만 파묻혀 지내라는 거죠."

―막(幕)이 내려오면 현실과 직면하는데, 현실 부적응자를 만드는 게 아닌가요?

"흥흥흥, 내가 감옥소 소장이지요. 단원들이 서른다섯 살쯤 되면 떠나라고 해요. 가정을 갖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여기에 붙어있으면 안 되지요. 속마음으로야 단원이 '남아있겠습니다'는 말을 해주길 바라지만요."

―통상 나이 들수록 원숙해진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집만 세지고 감각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요?

"연극을 평생 했지만 사실 나도 서른다섯 살입니다. 그 나이가 넘으면 극단을 떠나야 하니, 나이를 먹을 수가 없어요. 철도 안 들어요, 흥흥흥. 나는 나 자신한테 시비를 걸고 의심을 해요. 허구는 늘 새롭고, 새로운 실험을 안 하면 나이가 든 거죠."

―가장(家長)이란 돈을 마련해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인데 철이 없으시다니, 부인이 훌륭하겠군요.

"아마도 아내는 '11살 때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라 허구의 세계가 있어야 숨을 쉬지' 하며 두고보는 거겠지요. 사실 내 삶은 이미 고등학교 때 정해졌죠. 나는 편안하고 즐거울 수 없다는 거죠. 가족이 도시락을 사갖고 놀러가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가족은 처량한 생활을 한 거죠. 나는 허구의 세계라도 있었지만."

―솔직히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다른 삶에 대한 부러움이 없진 않지요?

"영화·TV에서 성공한 제자들이 밥 사겠다고 찾아와 차를 대놓고 내게만 '타시라'고 할 때 미치겠어요. 저는 라면·떡볶이를 먹든 항상 단원 아이들과 같이해요. 나는 벤츠를 타면 안 돼요. 애들이 걸어가면 나도 걸어가야죠. 여기서 가장(家長)인데, 애비가 차 타고 가봐요. 내 두 다리도 멀쩡하고요. 흥흥흥."

여기선 '메르스 파동'은 딴 나라 얘기였다. '한강은 흐른다' 공연은 18일부터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