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 6시 서울 목동야구장. 넥센과 한화의 프로야구 경기를 30분 앞두고 경기장 한쪽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20대 남녀가 캔맥주 6개를 들고 입장하려 하자 안전요원들이 "캔은 반입이 안 된다"며 막았다. 안전요원들은 "맥주는 잔에 따라 갖고 들어가라"며 옆 테이블 위에 있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가리켰다

20대 남녀는 "이걸 언제 따르냐. 김 빠져서 어떻게 마시냐"며 항의했다. 안전요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두 사람은 캔 3개를 열어 맥주를 컵에 따르다 안전요원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자 나머지 캔 3개를 재빨리 가방에 숨겨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 30여분간 이 입구를 통해 들어간 입장객은 600여명, 이 중 200여명이 캔맥주를 따서 컵에 따른 후 들고 입장했다.

①지난 3일 오후 넥센과 한화의 경기가 열린 서울 목동야구장 출입구에서 안전요원들이 병맥주를 갖고 들어가려는 한 남성을 제지하고 있다. ②한 야구팬이 6개들이 맥주 세트를 사 들고 경기장에 들어가고 있다. ③경기장 출입구에 미리 비치된 플라스틱 컵에 맥주를 따르는 모습. ④외부에서 구입한 캔맥주는 반입이 금지돼 있지만 내부 매점에서는 캔맥주를 팔고 있다. ⑤경기장에 몰래 캔맥주를 가지고 들어가 마시고 있는 야구팬들

올해 프로야구는 만년 꼴찌 한화의 부활, KT위즈 합류로 '10개 구단 체제' 운영 등 여러 흥행 요소를 갖추면서 관중몰이를 하고 있다. 프로야구는 2006년 304만명이었던 관중이 지난해 660만명으로 늘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관중동원 능력에서 프로축구(200만명), 프로농구(100만명) 등 다른 프로 스포츠를 압도한다. 야구위원회(KBO)는 올해 관중 800만명 돌파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잘나가는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최근 난데없는 '술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KBO가 올 시즌부터 '캔맥주 반입 금지'를 선언하고 소지품 검사를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규정에 따르면 술이 담긴 캔·유리병·PET병(1ℓ 초과) 반입이 제한된다. 하지만 일부 팬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항의가 속출하고, 맥주캔을 몰래 경기장에 갖고 들어가는 갖가지 편법도 등장하고 있다. 맥주캔 반입을 둘러싸고 전국 프로야구장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술 반입 천태만상

지난 2일 목동야구장 입구 네 곳에는 폭 60cm 높이 2m가량의 입간판이 놓여 있었다. '비 세이프!(B safe!)'라는 제목 아래 '안전한 관람을 위하여 주류 및 캔·병·1ℓ 초과 PET음료는 경기장 내 반입이 제한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전요원들은 입장객들에게 일일이 "가방 좀 보여달라"며 소지품 검사 협조를 요청했다. 가방이나 비닐봉지에서 캔맥주가 나오면 바로 옆 탁자에 마련된 500㏄ 들이 플라스틱컵에 따라서 가져가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일부 관중들은 이런 규정에 고분고분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선 '대담형'이 있었다. 한 30대 남성은 맥주캔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뒤 검색대를 당당히 통과했다. 또다른 20대 여성은 가방에서 맥주를 꺼내 미리 벗어둔 겉옷에 돌돌 말아 숨겨 들어갔다. 규정을 교묘히 파고드는 지능파도 있었다. 1ℓ 미만 PET병은 갖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 색깔별로 작은 용기를 마련해 술을 담았다. 사이다PET병에는 소주를, 보리음료PET병에는 맥주를, 쌀음료PET병에는 막걸리를 담는 식이었다. 과일과 술을 섞는 창조형도 보였다. 이날 포항야구장에선 수박화채에 사이다 대신 소주를 부어 '수박+소주' 화채를 만들어 들어가는 관중도 만날 수 있었다.

경기장 안에선 용케 숨겨 들어온 캔맥주를 마시려는 팬과 이를 제지하려는 안전요원 사이에 끝없는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특히 눈에 잘 띄는 맥주캔이 주 타깃이었다. 목동야구장에선 한화와 넥센이 3대3 접전을 벌이던 3회 말 넥센 김민성이 타석에 오르자 3루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때 20대 남성 두 명이 맥주캔을 높이 들고 환호하다 안전요원에게 발각됐다. 안전요원이 "캔맥주는 안 된다"고 하자 이들은 그제서야 입구에서 가져온 컵을 꺼내들었다.

지역과 경기장에 따라 술 반입 제한 방침이 각각 다르게 운영돼 팬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술 단속이 이뤄지던 시각, 경북 포항야구장에선 '국민 타자' 이승엽의 400호 홈런 장면을 기대하며 몰려온 1만5000여명이 경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관중들은 치킨·족발·피자 등과 함께 캔맥주를 마셨지만 이를 제지하는 안전요원은 없었다.

이날 포항야구장에선 입구마다 안전요원 4~5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소지품 검사는 하지 않았다. 속이 비치는 비닐봉투에 캔맥주나 소주병이 담겨 있어도 무사통과였다. 포항야구장 관계자는 "포항에서 열린 올 시즌 첫 경기"라며 "시민들이 술 반입 금지 조항을 잘 모르고 있는데다 흥행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단속을 엄격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관중 신해든(30)씨는 "똑같은 캔맥주인데 어디는 단속하고 어디는 안 하고 하는 식이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술과 함께한 프로야구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한국 프로야구 33년은 늘 술과 함께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1980~1990년대 프로야구장에선 선수 대(對) 선수, 선수 대 관중, 관중 대 관중이 뒤엉켜 각종 난동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관중이 던진 맥주캔이 사태의 도화선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난투사'(2015)에 따르면 맥주캔 투척이 촉발한 관중 난동은 1990년이 절정이었다. 그해 5월 대구 야구장에서 홈팀 삼성 라이온즈의 패색이 짙어지자 격분한 팬들이 간판 타자 이만수에게 맥주캔을 집어던졌다. 이 캔에 맞은 이만수가 관중석으로 다시 캔을 던지자 분노한 관중 300여명이 그라운드로 몰려나오거나 관객석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경찰이 출동해 최루탄 10여발을 발사한 끝에 '맥주캔 난동'은 수그러들었다.

이어 8월 잠실구장에선 LG·해태 팬 수백명이 패싸움을 벌였다. 야구장 내 과도한 음주가 원인이었다. 대통령·내무부장관·검찰총장까지 나서 엄단 의지를 밝혔고 시민 19명이 구속됐다. 맥주캔이 날아다니던 광경은 '너무도 익숙한 그라운드 풍경'이었다.

2000년대 들어 자성(自省)의 분위기가 일었다. 일부 구단은 팬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하며 주류 반입 제한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경기장 안으로 캔과 병을 던지는 횟수는 줄었지만 행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2011년 6월 인천 문학구장에서 기아 이종범은 우익수 수비 도중 경기장 안으로 날아든 맥주캔 때문에 관중과 말싸움을 벌였다. 빈 깡통이 아니라 맥주가 들어 있는 캔이어서 위험했다.

이런 맥주캔·소주병 투척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술 문화 때문에 발생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만취할 정도로 마셔야 '술 마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삐뚤어진 술 문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못하면 홧김에 들고 있던 캔이나 병을 던져버리는 잘못된 풍조 역시 여기서 나왔다"고 했다.

이러한 술 문화가 바뀌게 된 계기는 뜻밖에 야구장 바깥에서 찾아왔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던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야구장 내 캔맥주 반입에 대해서도 '계속 이래도 좋겠느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KBO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는 선수와 관중 모두의 안전을 위해 캔처럼 위험한 물건을 들여오면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야구를 제대로 즐기려면…"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장엔 바깥에서 산 술을 일절 가지고 들어갈 수 없지만 경기장 안 매점에선 맥주를 플라스틱 컵에 판다. 특히 미국의 경우 9·11테러 발생 이후 이 규정을 더욱 까다롭게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프로야구장엔 외부 주류 반입이 가능하지만 종이컵 등에 담아서 들어가야 한다. 프로야구 관계자는 "맥주 마시는 건 대부분 허용하는데 이는 몇 잔 마셔도 크게 취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선수와 구단은 이번 조치에 대해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SK 박진만 선수는 "맥주가 가득 찬 캔에 정통으로 맞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어 늘 불안했는데 정말 다행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KBO 등 야구단체가 추진하는 '주류 판매량 제한' 조치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란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KBO는 외부 술 반입 금지에 이어 경기장에서 사 마실 수 있는 맥주의 양을 '한 번에 4잔'으로 제한하고, 7회 이후엔 판매를 중단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KBO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한 번에 살 수 있는 맥주는 딱 2잔"이라며 "술을 구입하는 행위를 번거롭게 만들면 아무래도 음주량이 줄어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사람마다 경기를 즐기는 스타일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맥주 구입량을 제한하는 것은 야구팬의 반발을 살 소지가 있다"고 했다.

조정식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야구장 음식 문화는 현재 과도기"라며 "KBO와 각 구단이 시민들을 설득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느냐에 따라 대표적 스포츠인 프로야구 관람 문화의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