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오후 8시 40~50대 중년 여성 5명이 서울대 관악캠퍼스 공과대학 건물에 들어섰다. 수업이 끝나 인적이 뜸해진 건물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가 싶더니, 곧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여학생 4명이 이들에게 다가왔다. "공대 선배님들 맞으시죠? 학교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여학생들이 돌아가며 이름과 학과 등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자 한 중년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얘들아. 난 졸업한 지 좀 됐어. 섬유공학과 86학번이야."

이날 서울대 공대를 찾은 이들은 이른바 '서울공대 아름이' 출신이다. '공대 아름이'는 몇 해 전 한 통신사 광고에 등장한 여자 공대생의 이름을 따 남학생이 다수를 차지한 공대에서 여자 공대생을 일컫는 애칭이 됐다.

이처럼 여학생이 드물기로 소문났던 서울대 공대에서 개교 이래 처음으로 오는 30일 공대 여동문회가 주최하는 '서울대 여성공학인의 날' 행사가 열린다. 1984년 처음 만들어진 공대 여동문회가 올해 여성 졸업생이 2200명을 돌파한 것을 기념해 행사를 기획했다.

지난 22일 서울대 공과대학 실습실에서 공대 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모여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울대 공대 여(女)동문회는 여성 졸업생이 2200명을 돌파한 것을 기념해 오는 30일 개교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 여성 공학인의 날’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행사 준비를 위해 모교를 찾은 중년의 여성 졸업생들은 공대에 여학생이 한 학년당 10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동문회 회장을 맡은 류전희 경기대 교수(1986년 건축학과 졸업)는 "내가 다닐 때는 공대생 1000명 중 여학생은 24명뿐이어서 건물에 여자 화장실이 드물어 남자 화장실을 몰래 사용하고 나오다 남학생들과 마주쳐 민망한 일도 있었다"며 "여후배들이 이렇게 늘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1946년 문을 연 서울대 공대를 처음으로 졸업한 여학생은 대한석유공사 임원을 지낸 고(故) 성정자(1953년 화학공학과 졸)씨다. 그 뒤로 1999년까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여학생은 450명. 1970년대 1000명 정원에 5명이 채 안 됐던 여자 신입생은 1990년대 말까지도 30~40명에 머물렀다.

2000년대 들어 IT 붐이 일면서 공대를 선택하는 여학생이 늘기 시작했다. 2000년 처음으로 여자 신입생이 100명을 넘어선 이후 한 학년당 800명 정원에 110여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여학생은 컴퓨터 공학부 등 총 11개 과에 127명으로 전체 입학생의 16% 수준이다. 1~4학년 재학생은 550여명으로 개교 이후 1999년까지 졸업한 여학생 숫자를 뛰어넘는다.

여학생이 늘면서 서울대 공대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2000년대 이후 여학생이 급증하자 공대 측은 건물 모든 층에 여자 화장실을 마련했고 최근엔 여학생 전용 휴게실과 기혼 여학생용 수유실도 설치했다. 2012년에는 'H2O(High Technology wOmen netwOrk)'라는 여성동아리도 생겨났다.

이 말을 들은 문수진 유한킴벌리 본부장(1990년 섬유공학과 졸업)이 "우리 때는 여학생이 귀해 남학생들한테 연예인처럼 대우받는 일이 흔했다. 모르는 남학생이 내 이름을 알고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하자, 재학생 백지영(기계항공공학부 1)양은 "요즘은 여자라고 특별 대우해주는 건 없다"고 했다. 최정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1990년 무기재료공학과 졸업)이 "우리 때는 공대 신입생 중 여자가 16명밖에 안 돼 과에 상관없이 체육 수업을 함께 받아 '전우애'가 생겨 지금도 대부분 연락하고 지낸다"고 하자, 후배들은 "그건 부럽다"며 맞장구쳤다.

공학도 출신 여자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공대 '아름이'들에게 여전히 고민은 있다. 한 학생은 "밤을 새워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학생과 비교하면 체력이 달려 힘들다"고 했고, 다른 학생은 "대학원 진학 이후 진로가 고민인데 상담을 해줄 만한 친한 여자 선배가 없다"고 토로했다. 선배들은 "우리도 똑같이 경험했던 것들"이라며 "우리 때는 여자 공대생 하면 머리에 뿔 달린 사람처럼 바라보고 남자들의 자리를 뺏으려 한다는 주위 시선과도 싸워야 했다"고 했다. 서영주 미사 ANC 건축사무소 소장(1992년 건축학과 졸업)은 "여성 공대인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결혼 후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는 것"이라며 "'경력 단절녀'가 된 동기들도 꽤 있다"고 말했다.

'공학 분야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뛰어날 것'이란 통념과 달리 지난 학기 서울대 공대 여학생 2, 3학년의 평균 성적은 4.3점 만점에 3.3, 3.4점으로 남학생보다 각각 0.1점씩 높았다. 여자 신입생의 성적은 3.1점으로 남학생보다 0.1점 낮았으나, 4학년 성적은 3.4점으로 남학생과 비슷했다.

서울대 공대 관계자는 "최상위권 성적을 내는 학생은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