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번쩍거려

우리 집엔 현실이 광속으로 건너다닌다
그릇에서 책으로 책에서 벽에 걸린 사진 속으로
미래는 빨리 돌아와, 순간순간이 벌써벌써죠
정지한 것 같지, 한순간 모든 게 끝나는 게
만물의 위장, 나도 그 사이에서 발가벗고 어슬렁거린다
한쪽 어깨를 내놓은 보리수 아래의 늙은 구도자처럼
밥그릇과 책과 사진을 들고
이렇게 뭔가를 걸식하고 빌려 쓰다 사라지죠, 광속으로
아들이 사진 찍을 수 없는 광속으로
그런데 뭘 기다리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 것 같다
저녁이며 물바닥이며 거울이며 마음이며 땅이며
아침이며, 그 외의 광속 따위도 많았지

―고형렬(1954~ )

시간은 잠시도 머무는 일이 없다. 시시각각 바뀌어 가버린다. 산골짜기에서 쏜살같이 흘러내리는 물처럼. 미래도 이처럼 신속하게 와서 도망치듯 후딱 저편으로 지나간다. 그 시간의 뒷등을 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날쌔게. 미래는 빨리 와서 한 컷의 사진 속으로 앨범과 액자 속으로 들어간다. 금세 옛날 일, 옛날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도 얻어먹고 누군가에게 빌려 사사로이 사용하다 광속으로 사라진다.

부처는 그래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온갖 것은 다 무상(無常)하다.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일렀다. 그러나 이 말씀의 속뜻은 지금 여기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서 행복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