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6시 4분 독일 베를린 중심가 빌헬름거리의 한 수퍼마켓 앞에 방탄 처리가 된 아우디사(社)의 검은색 대형 세단 'A8'이 미끄러지듯 멈춰섰다. 곧 연두색 상의에 검은색 바지 정장, 굽이 아예 없는 구두를 신은 단발머리 여성이 꼬깃꼬깃한 백화점 장바구니를 들고 뒷좌석에서 내렸다.

지난 30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의 22년 단골 수퍼마켓에서 직접 장을 본 뒤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정치지도자인 독일 현직 총리, 앙겔라 메르켈(61)이었다. 그녀는 혼자 1유로(1200원)짜리 동전을 넣어 카트 한 대를 꺼내더니 성큼성큼 수퍼마켓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또 다른 아우디에서 내린 짙은 회색 정장의 경호원 2명은 5~10m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총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가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리자 2명 중 나이가 더 많은 경호원이 멀리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메르켈 총리가 맞다'는 뜻이었다. 이 수퍼마켓은 메르켈 총리가 1993년부터 찾는 곳이다. 당시 메르켈은 서른아홉 살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이었다.

지난 30일 저녁 베를린의 단골 수퍼마켓에 장 보러 들러 식료품 진열 코너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위 큰 사진). 낮부터 대기하던 기자가 총리와 경호원이 들어서자 신분을 밝히고 양해를 구하면서 촬영했다. 이곳은 외관도 내부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도심 수퍼이다(아래 오른쪽 사진). 메르켈 총리는 종종 남편 요아힘 자우어(아래 왼쪽 사진 속 남성) 훔볼트대 교수와 함께 장 보러 오기도 한다.

이후 특별한 해외 일정이 없다면 그녀는 꾸준히 매주 이 수퍼마켓으로 와서 생필품을 구입한다. 좀처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남편 요아힘 자우어 훔볼트대 교수와 함께일 때도 많다.

이곳에서 22년째 메르켈 총리를 봐 왔다는 직원 헬가 마쿠아스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주로 퇴근길에 들러요. 그럴 때면 우리가 뉴스에서 보던 정장 차림이지요. 쉬는 날에는 청바지를 입고 오기도 합니다. 뭘 사는지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지만, 오렌지는 꼭 사요. 그녀는 모든 종류의 물건을 삽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일반 시민과 별 다를 게 없다는 뜻입니다."

마쿠아스씨는 "그녀가 총리가 된 후 달라진 점은 원래 혼자 오던 사람이 경호원과 함께 온다는 것뿐"이라며 "총리도 본인의 공간을 원하기 때문에 경호원들이 달라붙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우리와 똑같은 일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아주 친근하지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가 이날 수퍼마켓을 찾기 전 사흘간 한 일은 다음과 같다. 28일 덴마크를 하루 일정으로 방문해 헬레 토르닝슈미트 총리를 만났고, 기자회견에서 "유럽 각 나라는 인구와 경제력에 걸맞게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현지에서 대학 강연을 했다.

29일에는 그리스 구제금융 분할금 지원 협상 문제를 다뤘으며 30일에는 일부 언론이 제기한 독일과 미국 정보기관의 합작 도청 스캔들 문제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대응했다. 또 베를린에서 250여㎞ 떨어진 독일 북동부 마로우의 동물원을 방문해 여우원숭이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 먹이를 주고, 펭귄 전용 지역 개설을 축하했다. 그리고 돌아와 퇴근길에 수퍼마켓에 들른 것이다.

하지만 수퍼마켓에서 '철의 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날 오렌지, 샐러드용 채소, 가지, 양배추 등 신선 식품과 로션, 주방용 타월, 크림치즈, 레드와인, 초콜릿, 밀가루, 토마토 소스 등을 구입했다. 시든 양배추 껍질을 일일이 떼어낸 뒤 상품을 카트에 담거나, 눈을 가늘게 뜨며 루콜라(샐러드용 채소의 한 종류)의 선도를 살피는 모습, 종이에 미리 적어온 쇼핑 내역을 보며 물건을 이리저리 찾는 모습은 평범한 아줌마와 다를 바 없었다.

수퍼마켓 안 사람들은 총리와 마주쳐도 놀라지 않고 장보기에 집중했다. 메르켈 총리 역시 계산대로 가서 남들과 똑같이 줄을 서고, 물건을 올려놓고, 판매원과 눈인사를 한 뒤 장바구니에서 푸른색 장지갑을 꺼내 카드 결제를 했다.

출입구에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던 20대 청소업체 직원은 수퍼마켓을 나서려는 메르켈 총리에게 "혹시 집 안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느냐"며 잡아끌었다. 그녀는 멈춰 서서 "고맙지만 저는 집 안 청소를 대신 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요. 다만 앞으로 당신의 일이 잘 되길 빕니다"라고 말했다.

20여분이 지난 오후 6시 30분, 메르켈 총리와 경호원이 탄 아우디 2대가 수퍼마켓을 떠나 총리가 살고 있는 근처의 소박한 아파트로 향했다.

이날 상점 안에서 기자가 신분을 밝히며 메르켈 총리의 사진을 촬영하자 멀리 서 있던 경호원이 다가와 "총리의 사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찍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기자가 "이것이 내 직업이고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장을 직접 보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에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자 경호원은 살짝 웃으며 "이해는 하지만 이곳은 총리에게 사적인 공간이어서 가급적 찍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기자에게 "당신이 미안해할 것은 아니다. 다만 인터뷰에는 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앞서 수퍼마켓 스낵 코너에서 일하던 직원은 일주일 동안 이곳을 찾아와 메르켈을 기다리던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총리는 이번 주 목요일(30일)에 올 거 같아요. 원래 대부분 수퍼마켓 휴일(1일 근로자의 날) 전날에 장을 보잖아요. 물론 우리는 총리가 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지요. 그녀는 당신이나 나와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