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 시절 어떤 총리는 매일 대통령에게 문안(問安) 전화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통령에게서 전화라도 오면 벌떡 일어나 "예, 각하" 하며 굽실대듯 해 직원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전두환 대통령 때 어느 총리는 집무실 책상을 북쪽 청와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임 향한 자세'로 앉겠다는 뜻이었다. 총리실에서 15년 일한 정두언 의원이 저서에 정리해놓은 역대 총리 이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의전(儀典) 총리' '대독(代讀) 총리' 같은 말엔 그런 총리들 모습에 대한 비아냥이 담겼다. 왕조시대 영의정에 빗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할 총리도 없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의 공동 창업자 격이었던 김종필 총리는 장관 몇 자리 추천권도 갖고 있었다. 그를 이은 박태준 총리도 실세 총리로 통했다. 그러나 두 사람도 결코 대통령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대통령과 내놓고 어긋난 총리로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항명하다 4개월도 안 돼 물러난 이회창 총리 정도다.

▶헌법은 20개 조에 걸쳐 대통령의 권한과 예우를 상세히 정해놓았지만 총리에 대한 것은 2개 조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통령 보좌' '대통령 명(命)을 받아 행정 각 부 통할'쯤이다. 태생적으로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존재라는 얘기다. 대통령도 정치적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 총리를 바꾸곤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방탄 총리' '국면 전환 총리'다.

▶권력의 약한 고리를 찾는 야당은 대통령을 직접 공격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총리를 표적으로 삼곤 했다. 김대중 정권 때 총리 청문회 제도를 도입하면서 특히 심해진 현상이다. 두 총리 후보가 연달아 위장 전입 등으로 물러났다. 노무현 정권 때는 이해찬 총리가 3·1절에 골프 쳤다가 사퇴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처음부터 '세종시 총리'라 불렸던 정운찬 총리는 정권 차원에서 추진했던 세종시특별법 수정안이 부결된 데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완구 총리가 취임 63일 만에 심야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 정권 들어 총리 후보까지 치면 벌써 다섯 명째다. 정홍원 총리만 무사했고 다른 사람들은 발가벗겨지다시피 하면서 퇴장당했다. 부동산 투기, 과다 수임료, 거듭된 말 바꾸기…. 이유도 가지가지다. 이러다 보니 총리 후보로 검토될 만한 사람들이 전화기를 꺼놓는다는 씁쓸한 우스개가 돈다. 총리가 과연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하는 냉소도 만연해 있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돌파구 또한 찾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총리 잔혹사(史)를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