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전자회사에서 일하는 김철호(가명·29)씨는 지난해 11월 친구 4명과 '북유럽 이민계'를 결성했다. 김씨는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도 없다.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에 이젠 지쳤다. 이렇게 살다가 인생 끝날 것 같아서 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계원 5명 모두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이나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민 준비 자금으로 적립하는 곗돈은 한 사람당 월 50만원이다. 지금까지 1000만원을 모았다. 김씨는 "곗돈은 함께 이민 의지를 다지자는 취지로 모으는 것"이라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모여 영어도 공부하고 현지 취업 정보도 알아본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성규 기자

한국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해외 이민, 그중에서도 북유럽 이민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 이민 대상국은 미국 등 북미나 일본·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뉴질랜드와 호주 등 오세아니아, 독일·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민 수요층은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대세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민 희망지로 북유럽이 급부상하고 있다. 소위 좋은 대학 나와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20~30대 젊은 층이 전면에 나서는 점도 특징이다. 이들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땅'을 찾고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한경쟁의 압박은 날로 거세지고, 뼈 빠지게 일해도 서울 시내에 아파트 한 채 사기 어려운 데다, 이런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도 갖기 어렵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 4개국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는 2007년 2123명에서 2013년 4113명으로 2배 수준으로 늘었다.

명문대 출신 30대가 떠난다

북유럽은 그동안 이민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하는 '오지(奧地)'였다. 이민 전문가 새미 리(42)씨는 "이민 국가를 선택하는 기준은 우수한 복지 제도와 수준 높은 교육 환경, 깨끗한 자연 환경 등"이라며 "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는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데다 국가적으로도 이민 정책을 활발히 시행해 이민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이민 갈 수 있는 좋은 곳이 많았기에 낯선 북유럽에까지 눈길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상황이 바뀐 건 2010년대 들어서였다. 우리나라가 덴마크(2010년)·스웨덴(2011년)과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맺으면서 북유럽 국가를 왕래하는 젊은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국가 간 워킹홀리데이 협정이 체결되면 만 30세 이하 청년들은 상대 국가에서 1년 동안 일을 하면서 현지 경험을 할 수 있다. 약 300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은 이 체험을 통해 한국 사회에 북유럽 문화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기존 이민 시장에서 강세를 보였던 국가들이 이민 조건을 까다롭게 바꾼 것도 북유럽으로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했다. 새미 리씨는 "2010년 이후부터 캐나다 등의 이민 조건이 까다로워졌다"며 "그에 따른 '풍선 효과'로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북유럽 이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짐 싸는 사람'이 젊은 층이라는 점이다. 이민 업계에선 이를 '명문대 졸업하고 대기업 다니는 30대'라고 요약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북유럽 이민을 알아보고 떠나는 사람들의 전(前) 직장을 알아보면 삼성전자가 가장 많고 LG전자가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의 '등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30대가 '희망이 없다'며 고국을 떠나는 상황이 됐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무한 경쟁, 각종 '갑질 논란', 지배층의 온갖 비리와 추문을 지켜본 젊은이들의 실망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학력자가 많다는 것도 눈에 띄는 트렌드다. 서울대를 졸업한 윤모(32)씨. 4년 동안 다니던 대기업을 최근 그만두고 스웨덴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세계 최악 수준의 경쟁을 뚫고 대입과 취업에 성공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길을 찾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북유럽이 아직 한국인에겐 생소한 지역이라는 점이 명문대 출신 30대가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미국·캐나다·뉴질랜드 등에는 이미 한국인들이 많이 가 있어 이민을 가면 한국인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고학력 엘리트일수록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이 같은 환경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북유럽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북유럽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삶'을 이민의 첫째 이유로 꼽는다. 교육이나 성공 기회를 중시하는 다른 지역 이민자와 다른 양상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기반해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국가가 강력한 복지망을 구축해 개인의 삶과 행복을 지켜줘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최연혁 스웨덴 쇠데르턴대 교수는 저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2013)에서 "스웨덴 국민은 실직과 병으로 소득이 없을 때 본인이 낸 세금으로 국가가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믿기 때문에 삶 자체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다"고 했다.

북유럽 국가의 높은 공동체 의식이 좋아서 떠나겠다는 사람도 있다. 신필균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은 저서 '복지국가 스웨덴'(2011)에서 "스웨덴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기 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꿈과 기회를 뒷받침해주는 성숙한 사회다. 어느 특정 계층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북유럽 이민 열기의 이면엔 빈부·지역·이념 갈등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이 견고한 사회적 통합을 이룬 북유럽 국가를 선망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종한(48)씨는 2년 전부터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디자인연구소 '노르딕후스'를 운영하고 있다.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했다가 2013년 다시 스웨덴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그는 "북유럽 사람들은 비싼 자동차나 옷으로 부(富)를 과시하는 사람을 가장 천박한 부류로 경멸하고, 권력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그다음으로 싫어한다"며 "어떤 직업을 가졌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을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뿌리 깊다. 이 문화 속에서 나 자신이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진입 장벽 높지만 정착하면 만족도 높아

북유럽 이민은 진입 장벽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만이 좁은 문을 뚫을 수 있다.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로 이민을 가려면 우선 기업, 연구소, 대학 등 현지에서 취업을 해야 한다. 기술 이민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덴마크도 선발 절차가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기계·건설·전자·IT 기술자, 의사, 건축가 등 전문 인력이 필요한 직업군과 학력 조건(학사 이상)을 미리 공지하고 심사를 거쳐 선발한다. 자영업을 원하는 경우엔 사업 계획과 재정 조달 방안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서류 심사와 면접은 모두 영어로 이뤄진다.

이민 업계 관계자들은 "관련 전공이나 경력이 없이 북유럽 이민을 가려면 현지 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한 뒤 직장을 잡는 것이 좋다"며 "유학생 학비 역시 거의 무료라 영어 실력만 있으면 도전해볼 만하다"고 말한다.

일단 체류 허가를 받으면 교육·의료 등 복지 혜택을 그 나라 국민과 동등한 수준으로 받을 수 있다. 현지에 정착한 이후엔 정부가 정기적으로 이민자들의 취업 상태를 점검한다. 취업 상태를 수년간 유지하는 등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부여한다. 현지 이민자들은 "정착에 성공하면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말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정유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하는 김태훈(33)씨는 "만족도가 80점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대전도시공사에서 근무하다가 2009년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김씨는 "하루 근무 시간은 7.5시간이고 야근은 없다. 퇴근 후엔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취미 활동을 한다. 자기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 코펜하겐 근교 도시의 한 일식당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황순재(38)씨는 한국에서 경영학과를 나와 병원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다가 덴마크에 가서 직업을 바꿨다. 그는 요즘 하루 10시간 일한다. 대신 주 3~4일 쉰다. 휴가는 1년에 4주가량 된다. 그는 "아들 둘이 있는데 대학교까지 학비가 무료다. 사교육에 몸살을 앓는 한국과 달리 자녀 교육 걱정이 없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민 경험자들과 전문가들은 "북유럽의 복지 제도가 잘 갖춰진 것은 사실이지만 낭만적인 생각으로 접근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민 전문가 새미 리씨는 "북유럽은 조용하고 안온한 일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한 나라지만 시끌벅적한 한국식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지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유럽 이민을 위한 취업을 준비하다 '너무 심심하고 조용하다'며 네덜란드·독일 등으로 바꾼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웨덴 이민자 이종한씨는 "북유럽은 한국이나 미국처럼 무한 경쟁을 통해 큰 부나 성공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에겐 맞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율이 30~50%나 되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빨리빨리'나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일처리에 익숙한 한국인이 적응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덴마크·노르웨이에서 극우 정당 지지율이 높아져 일부에선 인종차별적 경향이 나타나는 흐름이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