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또 한 번 지뢰 폭발음이 들렸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환청이라 생각했다. 방금 후임 대대장 다리를 앗아간 지뢰의 폭발음이 귓가에 남았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엄청나게 뜨거운 열기가 몸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뒤를 돌아봤다. 신고 있어야 할 전투화가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살은 너덜너덜했다.

"아, 내 다리…."

2000년 6월 27일 오전 경기도 파주지역 DMZ(비무장지대) 수색작전에 나섰던 이종명(56) 대령은 그렇게 두 다리를 잃었다. 판문점에서 동남쪽으로 약 5㎞ 떨어진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이었다. 그날은 수색대대장(중령) 이종명이 후임 대대장에게 임무를 인수인계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첫 지뢰는 돌아오는 길 맨 앞을 가던 후임 대대장이 밟았다. 그의 두 다리가 날아갔다. 바로 뒤 중대장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눈앞의 상황은 급박했다. 이종명의 머리가 차갑고 빠르게 돌아갔다. 후방 30~40m에서 엄호를 맡고 있는 소대장과 병사들에게 알리는 게 급했다. 그는 수색팀에 할 일을 지시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사방이 온통 지뢰밭이다. 위험하다. 이곳은 내가 제일 잘 안다. 혼자 들어가서 두 사람을 구해오겠다. 대기하라."

부상이 심한 후임 대대장을 업으려고 쪼그려 앉으려는데 발 아래서 두 번째 지뢰가 터졌다.

그는 이후 26개월간 치료·재활을 거쳐 2002년 여름 육군대학(현 합동군사대학교) 교관이 됐다. 그리고 13년이 흘렀고 오는 9월 말 전역을 앞두고 있다. 1983년 소위 임관 이후 만 32년의 군 생활은 그에게 불행이었을까, 행복이었을까.

전역을 앞둔 군인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거울 속 군인이 웃을 수 있는 건 30년이 넘는 군 복무 기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스스로 격려할 수 있기 때문일까. 지난 13일 대전 유성구 합동군사대학교에서 만난 이종명 대령이 입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육군 정복(正服)의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합동군사대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방은 '뜻밖에도' 4층에 있었다. 심지어 그는 가끔 그 방을 걸어서 오르내린다고 했다.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오른쪽 다리에만 장애가 있는 듯했다.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서 절단했고, 오른쪽은 무릎 위를 절단했다. 오른쪽은 허벅지까지 의족을 했기 때문에 움직일 때 펴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 때는 왼쪽 다리를 먼저 올리고 나머지 다리를 끌어올린다.

"관절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정상인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 하나 있는 덕에 계단도 다닐 수 있으니까요."

―내 인생은 왜 이럴까 화도 나고 좌절감도 컸을 것 같다.

"지뢰 터졌을 땐 오른쪽 다리도 무릎 아래로 잘렸었다. 감염 부위가 커지고 상처가 곪으면서 무릎을 절단했다. 군의관을 원망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무릎을 살릴 순 없었느냐고. 그런데 이 한쪽이라도 무릎이 남아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날 봐라."

그는 사무실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줬다. 커피도 직접 타서 가져왔다.

―남들이 갈 수 있는 곳에 못 가고, 빨리 달릴 수도 없어 답답하지 않나.

"남과 다른 점이라면 조금 느리고 다닐 때 좀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손톱만 한 작은 돌도 잘못 밟으면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웬만한 곳은 다 간다. 합동대 뒤편에 해발 300m 안팎 금병산이 있는데 두 번이나 올랐다. 남들은 한 시간이면 올라가는데 난 5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래도 정상까지 갔다. 2004년 아내와 손잡고 이맘때쯤 처음 올랐는데 활짝 핀 산벚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두 다리 모두 의족을 끼고 사는 삶에 대해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는 "원래 키가 170㎝였는데, 의족을 한 이후 172㎝가 됐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지뢰 화염 때문에 화상을 입은 그의 손이다.

"위험하니 내가 간다. 위험하니 오지 마라"

육군에는 '위험하니 내가 간다'라는 군가가 있다. 1절엔 '저기는 지뢰지대 위험하니 내가 간다'라는 내용이, 2절엔 '여기는 지뢰지대 위험하니 오지 마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모두 이종명의 실화(實話)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으로 정부에서 보국훈장을 받았고, 육군이 2002년 제정한 '참 군인 대상'의 책임 부문 첫 수상자가 됐다.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살신성인탑이 세워졌다.

―원래 대대장 임기는 2000년 4월 30일까지였다. 그런데 6월 말까지 연장 근무하겠다고 자청했다고 들었다.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최초 계획은 대통령께서 육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나중에 이 계획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판문점과 DMZ 지역은 청와대 경호실도 안전을 책임질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비상 상황의 막중한 임무를 신임 대대장에게 던져놓고 나 몰라라 나올 수 없었다. 정상회담이 무사히 끝나면 마무리 인수인계하고 부대를 옮길 생각이었다. "

―임기 막판이었는데 그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 건 수색 대대에 대한 애착 같은 것 때문이었나.

"당시 대대장 임기는 통상 33개월이었는데 난 40개월을 복무했다. 어떤 장교, 어떤 병사보다 오래 그곳에 있었다. 소대나 중대는 책임 지역만 알지만 난 대대 관할 지역 전체를 손금 보듯 했다. 현장 인수인계는 직접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 수색로는 내가 개척한 곳이다. 전에 적이 침투한 때도 있었고, 귀순도 있었다. 중요한 길목인 셈이다."

―사고 지점이 군사분계선 부근이었는데 굳이 그곳까지 갈 이유가 있었나.

"적도 우리도 이곳의 의미를 잘 안다. 적도 이 근처까지 틀림없이 내려왔을 것이다. 우리가 수색·정찰하지 않으면 그들은 점점 더 대담하게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군사분계선 이남은 우리 땅이다. 우리 발로 지켜야 한다."

―지뢰가 있는지 몰랐나.

"지뢰가 있는 곳은 우리만 아는 표시를 다 해놓았다. 그 수색로는 전에도 여러 번 갔던 길이다. 지뢰가 없는 곳이었다. 전날 밤 비가 억수같이 왔다. 그 때문에 다른 곳에 있던 지뢰가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사태가 나지 않는 이상 그 정도 비로는 지뢰가 움직였을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적이 매설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나중에 통일되면 알 수 있으려나."

―첫 번째 지뢰가 터졌을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

"상황을 알리고 통제하는 게 중요했다. 언제든 적과 만날 수 있는 지역 아닌가.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나중에 들으니 수색팀은 우리가 기습당한 줄 알았다더라. 이럴 땐 정확한 상황 전파가 핵심이다. 상급 부대에 보고하고 구조 헬기를 요청하라고 했다. 첫 지뢰 터지고 합참 상황실에 보고되기까지 8분밖에 안 걸렸다. 군에서 신속·정확한 보고의 본보기가 됐다."

그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논 한 뙈기, 밭 한 뙈기 없어 남의 집 소작을 했다. 거의 머슴살이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꼭 공부는 해야 한다고 했다. 대학 입시 때 한국해양대학교와 육사에 합격했다. 주변에선 집 사정 생각해서 돈 잘 버는 마도로스(외항선원)가 되라며 해양대학교를 가라고 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쓰러진 두 사람을 구하겠다고 혼자 돌아간 건 지휘관으로선 무책임한 일 아니었나.

"그 지역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이다. 나 살겠다고 부하 장병 보냈다간 그들이 위험해질 수 있는 거였다. 그리고 당시 수색팀 지휘자는 팀장인 소대장이었다."

―두 번째 지뢰가 터진 뒤 어떻게 현장을 빠져나왔나.

"쓰러져 있는데 소대장과 장병들이 막 달려오는 게 보이더라. '지뢰다. 들어오지 마라'고 소리쳤다. 한 발짝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나가겠다고 했다. 소총을 끌어안고 포복 자세로 기어나왔다. 15~20m 정도였던 것 같다."

―그 20m는 살면서 가본 가장 먼 길이었을 것 같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안 나더라. 빨리 나가야겠다고만 생각했다. 안 그러면 눈 앞에 보이는 저 부하들이 뛰어들어올 판이었으니까."

―부상당한 두 사람은 어떻게 끌어냈나.

"기어갈 때 약간 옆쪽으로 이동해 자갈도 있고 풀도 있는 쪽을 택했다. 나온 뒤 부하들에게 '내가 기어온 흔적을 이용해 두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다."

이종명 대령은 2000년 DMZ에서 지뢰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오른쪽 다리는 무릎 위를,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그는 “한쪽 무릎이 남아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나 남은 무릎 관절 덕에 계단도 오르내릴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는가 봅니다"

원래 군에선 장애가 생긴 군인은 무조건 전역을 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이 문화를 바꿨다. 그의 군인 정신이 큰 반향(反響)을 일으키자 군 당국은 법 규정을 고쳐 복무 중 장애를 갖게 된 경우 군에 남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는 신체 장애를 입은 군인이 현역으로 복무한 첫 사례가 됐다. 2004년엔 대령으로 진급했다.

―군 안팎에서 참군인의 표상으로 알려져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았을 텐데 그만큼 부담도 컸을 것 같다.

"주변 시선과 관심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나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한 선배가 그러더라. '특별히 뭘 하라거나, 뭘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네게 주어진 임무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고…."

―실제로 자신의 존재가 군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느낀 적이 있나.

"2002년 여름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제2차 연평해전 때 한쪽 다리를 잃은 이희완 중위가 너무 실의에 빠졌다며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곧바로 달려갔다. 내가 한 가장 큰 일은 그의 앞에서 걸어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두 다리를 잃었네. 그런데도 의족을 신고 이렇게 잘 걷는다네. 자넨 한쪽 아닌가. 운동도 할 수 있고 거의 정상인처럼 살 수 있을거네.' 그 이후 이 중위의 얼굴이 밝아졌다고 들었다. 그도 나중에 현역으로 복귀했다."

―다리를 잃었다는 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사고 후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뜨는데 처음엔 주변이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어서 천국인 줄 알았다. 좀 있으니 주변에 저승사자 같은 존재들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옥인가 했다. 시력이 또렷해지자 그 얼굴들은 하나둘 내 아내와 부대 상관, 동료들이 됐다. 하나같이 걱정스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한 말은 '내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는가 봅니다'였다."

―두 다리가 잘린 상황에서도 다른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긍정적인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부러워하고, 어쩔 수 없는 걸 갖고 비관하면 나만 불행한 일이다. 무릎도 그렇다. 한쪽이라도 있는 게 정말 다행 아닌가."

―그래도 멀쩡한 다리가 있는 게 더 좋은 거 아닐까.

"부상을 당했기에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내가 무사하고 부하들이 부상을 입었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거다."

―그래도 다리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엔 의족이 보기도 싫었다. 웬만큼 상처가 아문 뒤 물리치료실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뇌를 크게 잘라낸 사람,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 전신이 마비된 사람…. 문을 딱 열고 들어갔는데 이런 사람 수십명이 재활에 매달리고 있더라. 이 사람들 뭐지. 특히 하반신 마비 환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다리는 멀쩡하게 있지만 전혀 움직일 수 없는데도 정말 열심이더라. 그를 통해 나를 봤다. 그 이후 물리치료실이 아침에 문 열 때 들어가 닫을 때 나왔다."

그가 수색대대장으로 복무할 당시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작전을 펼치는 모습이다.

"장병의 전우애는 줄탁동시(啐啄同時)"

그가 사고를 당했을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은 이제 ROTC(학생군사교육단) 50기로 임관한 뒤 직업 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동해안을 지키는 부대에서 해안 소대장과 대대 작전장교를 거쳐 연대 인사장교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 젊은 군인들이 몸과 정신적인 면에서 예전 선배들만 못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체력도 우리 때보다 훨씬 좋고 판단력도 좋다. 다만, 이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훈련시키느냐가 문제다. 병사들이 힘들다고 느끼는 건 입대 전 생활환경에서 떨어져 혼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에는 반드시 옆에 누군가 있다. 목숨 걸고 함께 싸울 전우다. 그걸 알게 되면 절대 힘들지 않을 거다."

―지난해 임 병장의 GOP 총기난사 사건과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등이 큰 충격을 줬다. 군 내부의 잘못된 관행과 문화가 존속한다면 전우애는 싹트기 힘들다. 장교와 지휘관들이 가장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간부들은 병사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칠 수 있도록,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정성을 쏟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훈련을 제대로 시켰는지, 제대로 사랑했는지 말이다. 장병 간 전우애는 줄탁동시와 같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 닭이 부리로 쪼아주듯 병사와 간부가 한마음이 돼야 한다. 내가 야전 부대 있을 때 훈련도 강하게 하고, 어려운 일도 항상 도맡았다. 그런데도 요즘도 만나는 부대원들이 '그때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고 하더라."

―돈을 쓰거나 휴가 등 인센티브를 많이 줬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군인이 무슨 돈이 있나. 대대장 때 일선 소대 가면 담배 한 갑 사서 나눠주고 같이 피운 게 전부였다. 다만, 수백명 병사들의 이름은 거의 다 외웠다. 소대장 중대장들이 어떻게 이등병 이름까지 다 아느냐며 놀라더라. 관심을 가지면 된다. 대대장이 자기 이름 불러주는 것, 자기를 안다는 것 그걸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내 생명을 구한 것도 그 병사들의 전우애였다."

―병사들의 전우애가 목숨을 구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지뢰 터졌을 때 병사들이 날 살렸다. 압박붕대와 허리띠, 군복 바지 고무줄로 상처를 싸매고 지혈을 했다. 칼로 나무를 자르고 군복 윗도리 두 개를 연결해 임시 들것을 만들었다. 거기에 날 얹고 1㎞가 넘는 산길을 쉬지도 않고 달렸단다. 병사들은 '대대장님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무조건 달렸다'더라. 후임 대대장과 중대장도 그렇게 후송했다. 군의관이 말하는 걸 들었다. 상처 응급처치가 정말 잘됐기에 곧바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목숨을 건졌다고."

현역 참군인 있다면 참예비역도 있어야

그는 요즘 하루 4시간씩 인터넷을 통해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1년 동안 14과목 수업을 듣고 1과목 실습을 하면 2급 자격증을 딸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최근 학교와 주변 분들에게 전역해도 합동대 교수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했다.

―지금도 합동대에 재직하고 있는데 전역 후 교수를 안 하겠다고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나.

"이 학교엔 예비역들이 갈 수 있는 교수 자리가 1년에 몇 개 정도 난다. 그걸 준비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내가 한 자리 차지하면 다른 분이 기회를 잃는다. 난 상이연금도 받고 보훈연금도 받는다. 생활하는 데 모자람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일을 해야지. 그게 어떤 일일지 호기심도 생기고 궁금하기도 하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는 건 앞으로 장애인 관련 일을 하고 싶어서인가.

"취직하려는 건 아니다. 기관이나 단체에서 봉사 활동을 하려 한다. 장애인 됐을 때 무슨 권리가 있고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또 장애인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최근 방산 비리가 잇따라 터져 나왔는데 그 뒤엔 언제나 자기 잇속에 눈이 먼 예비역들이 있었다.

"그런 뉴스 나올 때마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들도 처음 장교가 됐을 땐 얼마나 꿈이 컸겠나. 왜 그렇게 변했을까. 한번 군복 입은 사람은 영원히 군인이다. 예비역도 당연히 군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뭘 갖고 살아온 걸까.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한 몸 바치는 명예를 먹고 살았는데…."

―전역하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롤 모델이 없는 것 아닐까.

"우리가 현역 때 참군인이 되려고 애썼던 것처럼 전역한 뒤에는 '참예비역'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얼마 전 대학 총장님과 학교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복을 벗어도 죽을 때까지 군을 응원하는 사람으로 남겠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군 생활하면서 남과 다른 독특한 경험도 했고, 남다른 대우도 받았다. 그 관심과 고마움을 갖고 살아갈 거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교훈을 알리는 일도 열심히 할 계획이라고 했다. 분단됐고 군사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현실도, 그 의미도 자꾸 망각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분단을 느끼는 건 모든 사람이 다를 거다. 나한테는 이렇게 다리에 있다. 잘려진 두 다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