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서울 수유동 국립4·19 민주묘지 제1 묘역. 검은 양복 차림의 노(老)신사가 묘비를 쓰다듬고 있었다. 4·19 묘역에서 유일하게 이름 두 개가 나란히 쓰인 묘비다. '金泰年(김태년)·徐鉉戊(서현무)'. 묘비 앞에 꽃 두 송이를 놓은 노신사는 나직이 말했다. "벌써 55년이나 지났구려."
묘비를 찾아온 노신사는 중앙대 58학번 출신인 김정일(75)씨다. 그는 1960년 4·19혁명 당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가 산화한 중앙대생 김태년(당시 22세 약대생)·서현무(여·당시 21세 법대생) 열사의 '친구'다. 사실 생전에는 서로 일면식도 없었지만, 이들의 인연은 55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인생에서 아주 중요했던 시절에 함께 목숨을 걸고 거리에 나섰던 동지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영혼이나마 위로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매주 두 사람의 묘비를 찾는다.
김태년 열사는 1960년 4월 19일 "부정선거는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며 거리 시위를 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서현무 열사는 당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대 선봉에 섰다가, 경찰에게 끌려가 이틀간 심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불과 두 달 뒤에 숨졌다.
한창나이의 자식을 떠나보낸 두 사람의 부모는 그해 11월 '영혼결혼식'을 올려줬고, 이들을 충북 음성의 한 산에 합장했다. 그로부터 33년이 흐른 1993년, 정부는 수유동의 4·19 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시키면서 두 열사의 묘도 4·19 묘지로 이장했다. 하지만 사후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각각 99번과 49번 묘지로 20m가량 떨어져 묻히게 됐다.
이를 알게 된 김씨는 2년간 국가보훈처 등을 찾아다니며 이 부부를 애초대로 합장하기 위해 애썼다. 결국 1995년 11월 19일 정부는 이들을 다시 한곳에 묻어줬다. 이때 서 열사가 총상으로 숨졌다는 잘못된 비문도 김씨가 바로잡았다.
김씨는 서 열사가 자신의 누이 같고 김 열사는 매형 같다고 했다. 김씨는 "서 열사의 유일한 피붙이였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이제 세상에 '서현무'를 기억하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그래서 더 애달프다고 했다. 작년 묘역 입구에 설치된 표지석에 서 열사의 이름이 없어 수차례 민원을 제기해 간신히 스티커로나마 이름을 붙여 넣기도 했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체신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지난 2000년 경기도 의정부 우체국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는 "고귀한 피를 뿌리고 산화한 분들이 알게 모르게 푸대접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서 열사가 병상에서 쓴 수기 '우리를 죄인처럼, 나는 이렇게 연행당했다', 그리고 김 열사가 쓴 시 '선제(先題)'와 수필 '여승(女僧)'을 얼마 전에 찾아냈다"면서 "죽기 전에 두 사람의 유고집을 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