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 거의 매일 가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 대치동에 있던 '책세상'에서는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초판본을 샀고(세로로 되어 있어 결국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옥수동 근처의 '고구마 책방'에선 당시에 이미 절판된 강석경의 인터뷰집 '일하는 예술가들'을 샀다. 홍대 인근에 있던 '숨어있는 책'에서는 'GEO'와 '키노' 과월호를 한가득 사서 읽었다. 청계천과 신림동 녹두거리에 있던 수많은 헌책방을 돌아다니던 시절, 헌책방은 내겐 일종의 안전 가옥 같은 곳이었다.
실패한 기억이 가득한 청춘에게 남은 건 결국 책뿐이었다. 나는 책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돈이 궁해지자 결국 헌책방을 선택했다. 누군가에게 한번 버려진 것들에는 기이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말이다. 버려진 것에선 낡은 먼지 냄새가 난다. 나는 그 냄새가 늘 애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어쩐지 당시 내 모습과도 비슷했다. 먼지가 묻어 있는 책 표지를 깨끗이 닦고 책장을 넘기면 살짝 삭기 시작한 종이 위의 글자들 역시 조금쯤 낡아보였다. 하지만 낡아간다는 건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새로 산 책에 손가락을 쉽게 베였던 나는 헌책에는 손을 베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리사키 서점의 하루하루'를 보던 날, 그 영화가 도쿄의 헌책방 거리인 '진보초(神保町)'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기뻤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나 서울의 황학동 헌책방 거리 같은 분위기와 또 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쿄의 진보초는 서점만 170여 개가 있을 정도로 커다란 서점 거리로 알려져 있다.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은 주인공 다카코가 회사 동료이자 1년간 사귄 남자 친구 히데아키한테서 "나, 곧 결혼해!"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고당하듯 남자 친구와 헤어진 그녀는 한마디로 '멍'해진다. 사표를 낸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에게서 전화가 한 통 온다. 자신이 일하는 '모리사키 서점' 일을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만난 지 오래된 삼촌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이지만 다카코는 짐을 챙겨 들고 모리사키 서점 2층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다. 오래된 책들과 느릿느릿 살아가는 진보초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는 서서히 실연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짧은 휴식 같은 거라고 생각해. 여기는 항구고 너라는 배는 잠시 닻을 내린 것뿐이야. 그러니 잘 쉬고 나서 다시 출항하면 되지."
손님이라고는 거의 없고 한 권에 1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는 싼 책들만 팔리는 작은 책방. 단골이 몇 명 있긴 하지만 유독 말이 많아서 상대를 하자면 골치가 아픈 이 책방에서 그녀는 이방인이다. 무엇보다 책 읽는 걸 즐기지 않는 다카코는 오래된 책에 어떤 매력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날 밤, 그녀는 문득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수없이 많은 책 앞에 다가선다. 그녀는 쌓여 있던 책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손끝에 걸리는 책을 꺼낸다. 다카코는 서서 책을 읽는다. 독서는 늦은 밤을 넘어 나른한 햇살이 퍼지는 점심까지 이어진다.
독서로 한 인간이 치유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오래된 책을 좋아하는 진보초의 사람들은 조금 둘러 가는 듯 느리지만 도시와는 다른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 인터넷 서핑을 하는 속도와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어쨌든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옥상에 올라가 하늘 위 구름을 보면서 다이야키(일본식 붕어빵)를 먹으며 새로 사귄 친구와 얘기하는 다카코의 얼굴은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다. 한번 버려졌던 사람 특유의 따뜻한 먼지 냄새가 4월의 봄바람에 씻겨나간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면서 '내가 만약 다카코의 친구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써보려고 했던 소설 중에 헌책방에서 산 책 위에 적힌 전화번호로 장난처럼 전화를 걸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소설일 뿐이니까, 만약 다카코가 내 친구라면 실제로 있었던 내 이야길 들려주고 싶다. 가령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
"아주 오래전 이야기인데, 헌책방에서 작가의 사인이 있는 책을 발견할 때가 있었어. 내가 발견한 책 중에 소설가 박완서나 음악 평론가 강헌 선생의 사인본도 있었고, 이외수 선생의 소설도 있었지. 아무래도 소설 중에 특히 사인본이 많았던 것 같아. 만약 내가 작가가 되었는데 헌책방에서 자기 책을 발견하면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어. 왜냐면 이제 서울에는 헌책방이 거의 없어졌거든. 대형 인터넷 서점의 중고 서점이 크게 인기인데 그나마도 내 사인본을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
여기까지 얘길 하고 나면 다카코는 아무래도 "왜?"냐고 물을 거다. 그럼 나는 며칠 전, 수중에 돈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책을 팔 수밖에 없었던 후배 이야길 전해줄 수밖에 없다. 그녀는 대형 중고 서점의 계산대 앞에서 책을 내밀며 책값을 계산 중인 직원에게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이거 저자 사인본이에요! 예약 판매할 때 산 거라 희귀본이거든요. 값을 더 쳐줘야…."
그녀가 여기까지 말하자 서점 직원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 사인본이네요? 사인은 낙서입니다. 사인본은 일괄 수매(收買)로 1000원입니다!"
후배한테 이 이야길 듣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멍했다. 그것은 최근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쓸쓸한 이야기였다. 이것이 작가에게는 꽤 서글픈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는 실연당한 다카코와 비슷한 심정이 되었다. 후배 얘길 듣고 중고 서점에 갔다가 작가 사인본 몇 권을 발견했다. "한번 버려진 책에선 따뜻한 먼지 냄새가 난다"고 썼던 20년 전의 문장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낡은 헌책방과 쾌적한 중고 서점의 차이만큼.
●모리사키 서점의 하루하루―휴가 아사코 감독 영화, 소설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의 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