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의 80% 이상이 남성 관객인 뮤지컬 공연장은 드물다. 그런데 5일 저녁, 뮤지컬 '덕혜옹주'(문혜영 작, 성천모 연출)가 공연 중인 대학로 SH아트홀은 그랬다. 5인조 걸그룹 크레용팝의 멤버인 초아(본명 허민진·25)가 처음으로 뮤지컬에 출연하는 날이었다.

"울지 마라, 사랑하는 내 딸아. 엄만 여기 있단다…." 초아의 노래와 연기는 '초짜'답지 않게 노련했다. 청아하면서도 비극적인 감정을 실은 목소리가 소극장 객석에 제대로 전달됐고, 덕혜와 정혜 모녀를 맡은 1인 2역 연기는 명료한 발성으로 살아났다. 웅장한 느낌의 마지막 곡 '내 딸, 정혜일지 몰라요'를 부를 땐 객석 곳곳에서 굵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문혜영과 더블 캐스트로 ‘덕혜옹주’의 주연을 맡은 초아는 “모녀의 1인 2역을 상반되게 연기하는 게 무척 어렵다”고 했다.

"뮤지컬 무대는 제 오랜 꿈이었어요." 공연 전 연습실에서 만난 초아가 말했다. 아이돌 스타라고 캐스팅된 게 아니라, 수백 대 일의 오디션을 봐서 실력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2013년 전국을 강타한 '빠빠빠'에서 다른 멤버들과 함께 헬멧을 쓰고 '직렬 5기통' 춤을 췄던 그는 사실 숨겨진 가창력의 소유자다. 그해 말 홍명보 자선축구에서 애국가를 무반주로 독창한 영상을 본 해외 팬들이 "한국 국가가 저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춤추고 노래하길 좋아하던 소녀 허민진은 고등학교 때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노래, 연기, 춤을 모두 하는 종합예술이 뮤지컬이란 걸 알게 됐던 것. "어느 날 수학 시간에 알 수 없는 공식들이 칠판에 가득 적혀 있는 거예요. '아~ 내가 왜 저 이상한 문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2013년 ‘빠빠빠’ 활동 시절 모습(가운데가 초아).

곧바로 학교를 자퇴했다. 검정고시를 본 뒤 입시학원에 다니며 가수와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웠다. 유튜브엔 초아가 뮤지컬 '페임'의 한 대목을 부르며 땀 흘리며 춤추는 영상이 오른 적 있다. "입시학원 다닐 때 무대 테스트를 받은 건데, 팬들이 어떻게 찾아 올렸는지 모르겠어요." 서울예대 연기과에 09학번으로 진학했으나, 형편이 어려워 휴학하고 청소년복 모델로 일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1년 신생 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해서 들어간 걸그룹이 크레용팝의 전신인 '허리케인 팝'이었다.

크레용팝 신곡 'FM'으로 정신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꿈의 '다른 한쪽'을 실현하기 위해 택한 작품은 기존의 발랄한 이미지와는 달리 비극적 인물을 다룬 '덕혜옹주'다. "진지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역사에 희생되기만 하는 덕혜옹주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덕혜옹주를 연기할 거예요." 초아의 쌍둥이 동생이자 같은 크레용팝 멤버인 웨이(본명 허민선)도 오는 6월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무대에 선다. 대학로에서 '쌍둥이 뮤지컬 대결'이 벌어지는 셈이다.

▷뮤지컬 '덕혜옹주' 6월 28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 1666-5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