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때가 있다. 강릉 방향으로 가다가 호법 분기점을 조금 더 지나는 순간, 요즘 우리나라에선 보기 어려운 장면이 시야에 들어온다. 대형 철골조 사이로 높이가 족히 80m에 이르는 대형 크레인 20여 기가 우뚝 솟아 있다. 500t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는 하이드로크레인과 타워크레인들이 철골조 건물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SK하이닉스 이천 공장의 새 반도체 생산 라인 'M14' 건설 현장이다. M14 공장 건물은 동서 156m, 남북 331m로 축구장이 8개 가까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언젠가부터 이 정도 규모의 큰 공장이 건설되는 현장은 국내에선 보기 어려워졌다. M14는 아마 국내에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유일한 대규모 공장 건설 현장이 아닐까 싶다.
이 공장도 하마터면 못 지을 뻔했다. 반도체는 손톱보다도 크기가 작은 실리콘 칩에 복잡한 회로가 깔려 있는 제품이다. 반도체 집적도가 높아지면서 최근엔 회로의 선과 선 사이의 폭(幅)이 10~20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수준으로 미세해졌다. 회로 선폭이 40나노 이하이면 종전에 써왔던 알루미늄 회로선을 쓰기가 곤란하다. 회로 간격이 너무 좁아 전기 간섭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기 전도율(傳導率)이 더 좋은 구리를 써야 한다.
하이닉스가 있는 이천 지역은 수질보전 특별대책 권역이어서 구리를 포함한 특정 유해 물질 24종 배출 시설은 들어서지 못하게 돼 있었다. 하이닉스가 구리 공법을 도입하면 연간 배출하는 구리가 얼마나 될까. 폐수 처리 시설을 거쳐서 나오는 구리는 돼지 190마리가 연간 분뇨로 배출하는 구리의 양과 같은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기도는 돼지 사육 두수를 190마리 줄일 테니 하이닉스 공장 증설을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환경 당국은 이천 지역의 많은 축산 농가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새 공장 건설에는 그 기준을 들이밀었다.
구리는 자연 상태에서 공기나 물, 어디에든 미량으로 존재한다. 하이닉스가 폐수 처리 후 배출하는 구리 농도는 자연 상태의 남한강 물보다 검출 함량이 낮은 1~2ppb(물 1L에 0.001~0.002㎎) 수준이다. 그런데도 새 공법을 적용한 하이닉스 공장 증설 논란은 4년을 끌었다. 결국 정부는 배출수에서 검출되는 구리를 기준(8ppb) 이하로 유지할 수 있는 폐수 배출 시설을 설치하는 의미 없는 조건을 달아서 허용했다. 과학과 현대 문명이 이룩한 기술의 힘을 믿는다면 일찌감치 당연하게 내렸어야 할 결론이다. 바로 그 결정으로 지금 총 투자 금액이 15조원에 이르고,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만 1만명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며, 완공 후에는 전환 배치 인력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일할 첨단 공장이 솟고 있다.
하지만 그 결정의 실체를 알고 나면 허탈하다.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법 개정도 아니고, 국무회의를 거쳐야 하는 시행령 개정도 아니었다. 환경부 내에서 장관 결재만으로 가능한 고시의 한 항목을 개정한 것이었다. 정부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기업들에 "임금을 인상하라"고 압박한다. 세금을 쏟아붓는 재정 정책과 기업의 손목을 비틀기 전에 정부는 온갖 관료적인 이유를 갖다 붙여 깔아뭉개고 있는 제2, 제3의 환경부 고시가 없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