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민 국립외교원장

한때 21세기는 '동아시아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있었다. 막상 21세기를 맞은 현재,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라기보다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다. 힘·세력 균형·군비 증강·핵심 이익·지정학·민족 등 20세기의 용어들이 동아시아에서 넘쳐난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의 85%, 한국인의 83%, 중국인의 62%가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전쟁과 식민 지배로부터 탈피한 지 70년이 지난 동아시아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1일 서울에서 한·중·일 외무장관 회의가 3년 만에 재가동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 나라의 외무장관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동아시아의 현주소이지만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마주 보기도 싫어했던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기시다 일본 외상은 잔뜩 냉랭한 표정이긴 했지만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회의를 통해 2012년 이후 정체돼 있던 3국 협력 체제가 복원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다양한 3국 협력 사업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고 한·중·일 FTA 교섭도 가속하기로 했다.

특히 3국 차원에서 처음으로 역사 문제에 관한 합의를 도출한 것은 의미가 있다. 한·중·일 갈등의 근원인 역사 문제를 '역사를 직시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적절히 처리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또 이번 3자회의를 계기로 한·일, 중·일 등 양자 장관회의가 개최되어 냉각됐던 양자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됐다. 한·중·일 3국 차원에서 처음으로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나온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하지만 3국 협력이 실질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른 시일 내에 한·중·일 정상회담이 재개돼야 한다. 이번 회담에선 '가장 빠른 편리한 시점'에 정상회의가 개최되도록 노력한다는 합의가 이뤄졌지만 정상회담 개최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지난 3년간 회담이 열릴 수 없었던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70년에 즈음해 일본이 어떠한 메시지를 발신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관건은 4월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과 8월로 예정된 '아베 담화'다. 여기서 일본이 기존 역사 인식에서 후퇴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한·중·일 협력의 모멘텀은 상당 기간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베 총리는 한·중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한·일 관계가 복원되지 않을 경우 아베 총리는 내달 미국 순방에서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워싱턴은 한·일 관계 복원을 우선적 외교 과제로 생각하고 일본에 대해 적지 않은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국도 작년 11월 정상회담에 이어 최근 4년 만에 일본과 안보 대화를 재개하는 등 사실상 대일(對日) 대화 채널 복원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이번 회의를 주재하면서 일단 중재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리는 앞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평화 협력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더 강화해야 한다. 한·중·일 3국은 편협한 자국 이익의 틀에서 벗어나 경제 통합이라는 같은 꿈을 꾸어야 한다. 중국 꿈, 일본 꿈, 한국 꿈을 따로 꾼다면 결과는 냉혹할 것이다. 현 상황이 지속되면 동아시아 시대는 없다. 이제 각자의 꿈이 아닌 같은 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