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은 젊은 날 교사로 일할 때 학교 숙직실에 이 물건을 엎어놓고 책상 삼아 시를 썼다. 록의 대부 신중현은 가난했던 중학 시절 이걸 간이 거문고로 개조해 기타 대신 튕겼고, 한국 재즈 타악기 연주자 1세대인 류복성도 젊은 시절 이걸로 모의 드럼을 만들어 두드리며 꿈을 키웠다. 이 물건은 사과 궤짝이다.

대패질도 안 한 막송판들을 대충 못질해 짜맞춘 상자였어도, 단단하고 묵직해 한 번 쓰고 버리기에 아까운 물건이었다. 오늘의 골판지 사과 박스는 쓰고 난 뒤엔 납작하게 찌그러져 분리수거될 뿐이지만, 널빤지 한 조각이 귀하던 시절 서민들은 사과 궤짝을 가구 대용품으로 재활용했다. 엎어 놓으면 앉은뱅이 책상이나 밥상이 됐고, 트인 쪽을 앞으로 향하도록 부엌에 몇 개 쌓아 놓으면 밥·반찬·그릇 등을 보관하는 찬장이었다. 궤짝에 벽지를 예쁘게 발라 속옷, 양말 보관함으로 쓰기도 했다. 궤짝 안에 병아리나 토끼도 길렀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궤짝 널빤지를 가공해 책꽂이, 신발장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DIY(Do It Yourself) 가구 역사의 출발이었다. 국어학계 거목인 고(故) 이희승 선생은 6·25 때 수많은 책을 사과 궤짝에 넣어 피란을 떠났다. 그 덕에 1954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 궤짝들을 차곡차곡 쌓아 서재를 뚝딱 꾸며 방문객을 놀라게 했다.

사과만 그리는 작가 윤병락의 ‘가을향기’. 나무 사과 궤짝의 따스한 질감과 탐스러운 사과의 어울림이 사실적 회화 속에 표현됐다.

단칸방 한편에 놓인 사과 궤짝 책상과 찬장은 고달픈 인생의 상징이었다. 코미디언 고 이주일은 달동네 셋방을 전전하던 무명 시절의 가난을 '우리 살림이란 담요와 사과 궤짝 서너 개가 전부였다'는 말로 추억했다. 1960~1970년대엔 신문들도 사과 궤짝 가구를 만들어 쓰자고 했다. 조선일보는 '새마을 공작(工作)'이라는 난을 통해 사과 궤짝을 이용한 찬장 만드는 법을 소개하며 '경제적 부담이 적어 누구나 만들 수 있다'고 했다(조선일보 1972년 4월 23일자). 새 학기를 맞아 학생용 책상에 관해 안내한 기사에선 '경제가 허락지 않아 사과 궤짝으로 책상을 대용할망정 아이들 자세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높이를 조절해 주라'는 대목이 눈길을 잠시 머물게 한다(경향신문 1981년 4월 11일자).

오늘날엔 종이 사과 박스를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과 박스 하면 떠오르는 용처가 하나 있기는 하다. 수억원의 '검은돈' 다발을 숨겨 보관하는 용기로 첫손 꼽힌다. 가난한 이들의 물건이던 사과 궤짝의 시대는 가고, 거부(巨富)들이 사과 박스를 애용하게 됐다. 사과 상자 운명의 대반전(大反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