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30대 젊은 과학자는 광주 동구 학동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한 손에는 '광주과학기술원(지스트· GIST)' 건설 조감도가 들려 있었다. 광주 도심을 뚫고 이제 막 개발 바람이 부는 허허벌판 첨단산업단지 구석진 곳에 자리한 지스트 캠퍼스 부지에 어렵사리 도착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솟아오른 건물은 없었고, 택지를 조성하느라 땅이 마구잡이로 뒤집혀 있을 뿐이었다. 돌아가려는 택시 기사에게 통사정해 15분간 택시를 세워두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여기가 내 일터구나!"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해 8월 부교수로 정식 부임한 혈기 왕성한 과학자는 비아중학교 빈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1주일 만에 환경공학과 학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1995년 3월 지스트 개원과 동시에 캠퍼스 내에 들어선 생명과학동이 그의 사무 공간이었다. 행정동이 따로 없어 생명과학동 1층을 행정 사무실로 사용했기 때문. 당시 도서관은 환경공학동 1층에 있었다. 직함이 추가됐다. 도서관장 직무대리.
지난 11일 취임한 문승현(58·文昇鉉) 지스트 7대 총장은 지스트의 산증인이다. 지스트 개원 1년 전인1994년, 37세 파격적인 나이로 부교수에 부임한 문 총장은 20여년간 이 대학의 성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16일 지스트 총장실에서 만난 문 총장은 백발이 성성했다. 먹빛 머리털이 허옇게 세는 동안 휑뎅그렁하던 캠퍼스는 각종 실험실을 갖춘 연구동과 기숙사, 기혼자 아파트, 학생회관, 교수 아파트, 행정동 등 64개 동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조감도 상의 그 모습으로 변모했다. 특히 2008년 11월 준공된 3층 규모 극초단 초고출력 레이저 실험용 특수연구동은 전국 최고의 연구 시설을 자랑한다.
교수협의회 투표에서 1순위로 총장 임용 후보로 추천받은 문 총장은 "(원장) 직무대행 때만 해도 총장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2006년 부원장(당시 총장은 원장으로 불림)에 오른 그는 2007년부터 1년 동안 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문 총장은 "지스트가 하는 많은 일이 바깥에 덜 알려지는 듯하다"며 지역과 친근한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또 "물리와 생명과학 분야는 노벨상을 노릴 만큼 연구 수준이 뛰어나다"며 "지스트를 세계 초일류 이공계 대학으로 만들겠다"는 장기 목표도 말했다.
-20여년 동안 지스트는 얼마나 발전했으며, 앞으로 성장 계획은 뭔가.
"초기 목표는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수준의 대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언젠가 카이스트 정도의 평판을 얻고자 하는 게 일관된 목표였다. 지금은 규모 면에서 여전히 카이스트에 뒤지지만 비교적 특화된 연구 분야에선 어깨를 나란히 한다.
(지스트는 지난해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기관 QS사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에서 '교수 1인당 논문 피인용 수(citations per faculty)' 부문 세계 4위에 올랐다. 또 2002~2012년 국내 연구기관 중 지스트는 '피인용 상위 1% 논문 비율'이 1.72%로 국내 1위를 기록했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을 뜻하는 SCI 논문 가운데 피인용된 상위 1% 우수 논문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지스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몇가지 핵심 분야를 개척하고자 한다. 4년의 임기 동안 세계적인 기술 연구에 지원을 쏟아붓겠다.
융합 연구를 적극 지원할 작정이다. 아직 지스트는 공학 비중이 높다. 하지만 공학이 단독으로 하기보다는 자연과학과 연계돼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기초부터 잘 연결되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
교육은 하루 아침에 바꾸기 힘들다. 때문에 변화하는 기술적인 추세에 잘 대응하는 연구소 조직을 적기에 개편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자해 기초과학연구원(IBS)를 설립한 것도 그 일환이다. 기초연구의 결과는 공학적 설계를 통해 신산업과 신제품으로 발전된다. 기초과학과 공학의 연계를 강화하는 일부 학제도 개편하겠다.
'세계 초일류 이공계 대학'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대장정을 시작해야하는 중대한 시점에 도달했다. 통일시대에 대비한 국방과 우주‧항공 등 새로운 영역도 앞장서서 개척해 나가겠다."
-지난해 12월 나주로 이전한 한전이 '빛가람 에너지밸리'를 구축한다고 한다. 에너지 관련 기업 500개를 육성하고 중소기업 육성펀드 2000억원을 출연하는 게 골자다. 산학연 연구개발에 연간 100억원 이상을 투자하며 지역 인재 양성에 힘쓰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여기서 호남 최대 인재를 보유한 지스트가 빠질 수 없다. 앞으로 한전의 에너지밸리 구축에 있어 지스트의 역할과 계획이 있다면.
"한전 이전을 계기로 최근 광주·전남 주요 7개 대학과 인재 양성과 연구 개발 협약식을 열었다. 앞으로 한전과는 창구를 일원화해 전력 관련 전문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자 한다. 지스트 내에 정보통신공학부와 기전공학부, 신소재공학부가 한전의 최첨단 기술과 밀접한 연구를 이미 수행하고 있다. 한전이 나주로 온 만큼 이런 연구 역량을 한 데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아직 한전과 개별적인 협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좀더 세밀하게 전문 인력 양성에 힘쓰겠다."
-지난 1월 지스트에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개소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광주를 한국 수소자동차 허브로 키우겠다고 했다. 이 역시 지스트의 역할이 막대할 텐데.
"미래형 자동차 개발을 위한 연구와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 미래 자동차는 친환경 자동차가 대세이다. 친환경 자동차는 '수소'와 '혁신' 투 트랙으로 굴러간다. 현대자동차는 벌써 세계적인 수소연료전지자동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몇몇 기업과 치열히 경쟁 중인데, 현대의 기술이 시장 진입에 장애가 없도록 난관을 해결하는 역할을 지스트가 맡고자 한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스트가 모든 연구 역량을 지원할 계획이다.
하지만 미래 자동차는 단순히 친환경만 강조해선 안된다. 경쟁력을 키우려면 '지능형 스마트 카'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지스트 내에 이런 지능형 자동차 개발에 필요한 정보통신과 공학적 배경 기술과 연구력이 축척돼 있다. 자동차는 사라지지 않을 시장이므로 미래 자동차 패러다임을 선도한는 기술을 지스트가 개발할 작정이다."
앞서 지난 1월 27일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지스트 내에서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문을 열었다. 전국 17개 권역별로 산학연 협력모델을 만들기 위한 혁신거점이다. 광주혁신센터는 현대차그룹과 광주가 손을 잡았다. 이 센터는 자동차 관련 아이디어 창출과 사업화 과정을 모두 지원하며, 수소차 연구의 허브가 될 전망이다.
-자동차 인재 양성과 관련된 학과가 지스트에 있나. 앞으로 자동차 인재 양성 계획이 있다면.
"아직 관련 학과는 없다. 교과 과정을 따로 개설해 자동차 인재 양성을 유도하는 장기 계획을 갖고 있다. 학부생의 경우 올해 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우수한 학생들이 학부에 지원했는데, 그 절반이 지스트 대학원에 진학하고 있다. 좋은 인재들이 외국과 다른 지역에 가지 않더라도 광주에서 충분히 연구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과학의 문턱을 낮춘다는 의미에 지스트와 인접한 광주과학고와 국립광주과학관을 한 데 묶는 '과학 타운'을 조성하면 좋겠다."
전남 화순 출신 문 총장은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공과대(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대학원과 미국 일리노이공대 대학원에서 공학석사와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1994년 지스트 환경공학과에 부임해 환경공학과 학과장, 지스트 국제환경연구소장, 교학처장, 지스트 솔라에너지연구소장, 한국연구재단 에너지·환경분야 단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