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울적할 때 가끔 만화 '심야식당'을 본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꽤 한심한 이유였다. 울적할 때마다 대부분 배가 고팠던 것이다. '카모메 식당'이나 '수영장'처럼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유달리 세심하게 묘사한 일본 영화들이나 삼시 세끼 밥 차려 먹는 것 이외에 별다른 줄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삼시세끼' 같은 방송을 멍하게 보고 있는 것도 허기진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동명 만화가 원작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역시 줄거리랄 게 없다. 1인 무역회사의 대표이자 독신주의자인 '이노가시라 고로'가 거래처에 들러 일을 보고, 혼자 도쿄와 오사카의 소박하고 오래된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점심을 먹는 게 전부다. 주인공을 연기한 '마쓰시게 유타카', 일인(一人) 드라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직장인에게 점심이란 어떤 의미인가. 기다리고 기다려도 잘 오지 않는 유일한 힐링의 시간이 아닌가. 점심때 먹은 예상보다 맛있는 돈가스나 예상밖의 맛없는 카레가 그날의 기분을 좌우할 정도다.
흥미로운 건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식당이 실제로 존재하는 식당이라는 것이다. 가령 '고독한 미식가 시즌4'에 등장하는 도쿄 기요세 역에 위치한 '미유키' 식당이나, 시즌4, 2편에 등장하는 긴자의 한국 가정식 백반집 '단골정'은 원작자인 만화가가 즐겨 찾는 식당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은 소위 '고독한 미식가 투어'라는 걸 하기도 하는데, SNS를 보면 여기저기 드라마에 등장하는 곳에 실제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가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는 '미유키' 식당 편이다. 일단 식당에 들어가면 누구도 범접 못할 기이한 아우라가 있다. 식당 벽 위에 붙어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메뉴 이름들 때문이다. 시골풍 스파게티부터 카레, 돈가스, 각종 우동과 소바, 나로선 이름만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라멘과 반찬들이 가득하다. 고기와 생선 요리, 중화요리, 문어 요리에 이탈리아 음식까지 말 그대로 세계 요리 총집합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식당에는 '뜨겁게도 가능한 아이스커피'처럼 주인의 유별난 성격을 보여주는 특이한 메뉴도 있다(보통 사람들은 차갑게도 가능한 핫커피란 말을 즐겨 쓴다). 이 기이한 메뉴를 보다가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예스터데이'의 남자아이가 간사이 사투리로 중얼거리던 문장 하나가 떠올라 한참을 웃었다.
"어제는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가장 재밌는 건 식당 벽 전체가 메뉴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에서 밥을 먹으려면, 메뉴를 읽고 싶어하는 또 다른 손님을 위해 가끔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수그리거나 어깨를 옆으로 빼는 등, 재밌는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엉뚱한 식당인 게 틀림없고, 나는 이런 식당이 좋다. 메뉴가 100가지쯤 되는 식당에서 뭘 먹을지 결정하는 건 역시 너무 어려운 일이라, 천하의 '고로'씨 역시 고뇌에 찬 얼굴로 메뉴판을 바라본다.
현대인들의 '결정 장애'를 부추기는 메뉴들 앞에서 나는 배리 슈워츠가 '선택의 심리학'에서 한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사실 선택지가 더 적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행복해한다는 심리학 연구 사례들은 풍부하다. 선택의 자유가 많으면 마냥 행복할 것 같아도, 메뉴가 냉면 혹은 만두 딱 한 가지일 때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는 게 사람이란 뜻이다.
배리 슈워츠 같은 학자는 소비자의 선택지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때 생기는 불만을 막기 위해서 자기 규제 방법을 제안한다. 가령 우리는 제때 선택해야 하고, 세심한 선택자가 되어야 하며, 이 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의 것에 만족해야 하고, 결정했으면 뒤돌아보지 말고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제약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고로'상이 메뉴를 정하는 방식이 그가 말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메뉴판 앞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보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는 꽁치구이 정식에 우엉과 생미역을 먹는 사람이나, 압도적인 양을 자랑하는 (정체불명) 원숭이 라멘을 먹는 사람을 딱히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언제나 최고의 선택을 한다! 이 드라마에선 유달리 고로의 '독백'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독백의 90% 이상은 자신이 시킨 음식에 대한 논평이다.
"고야두부와 가지조림. 음…, 차분해지는구먼. 중화 만두와 다른 길을 걸어온 식당 만두. 좋아, 좋아! 된장마늘. 아! 역시 좋구나. 이것으로 밥 100그릇은 먹겠어. 여러 음식을 조금씩 다 먹을 수 있다니 행복하다!"
'미유키' 식당에서 그가 시키는 메뉴는 고기가 들어간 매운숙주볶음, 된장마늘, 밥, 된장국, 점보교자의 하프. 야끼도리다. 그는 이 음식들을 정말이지 맛나게(맛있게가 아니라 맛나게 말이다!) 먹는다. 라면 하나에 밥 한 공기를 다 말아 먹고도 그가 먹는 걸 보면 또 뭔가 먹고 싶어질 정도니 말을 말자.
게다가 드라마가 끝나면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 만화가가 나와서 실제 그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맛보기 시작하는데, 수줍은 얼굴의 식당 주인들이 나와서 메뉴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게 흥미롭다. 별수 없이 '고독한 미식가'를 보는 동안 나 역시 이곳에 등장하는 식당에 꼭 가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만큼.
●고독한 미식가-다니구치 지로, 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만화를 소재로 한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