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이다. 1988년 할리우드 영화사가 직배(直配)를 시작할 때는 스크린을 찢고 극장에 뱀을 풀었다. 2006년에도 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 스크린쿼터를 절반으로 줄일 땐 삭발 단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시절 한국 영화가 아니다. 20세기 폭스와 워너브러더스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한국 영화 제작을 본격화하는데, 우리 영화인들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분위기다. 시장이 성장하며 영화인들의 자신감도 함께 커졌다는 방증이다. 또 투자 재원이 다양해지고 잘못된 관행들이 바뀌게 될 거라는 기대가 있다.
◇폭스·워너가 만드는 한국 영화
시작은 폭스였다. 폭스는 자회사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FIP)'을 통해 2013년 신하균 주연의 액션물 '런닝맨'을, 작년엔 차태현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슬로우 비디오'를 만들었다. 올해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임상수 감독의 '나의 절친 악당들'을 상반기에 개봉한다. '추격자'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2월 말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 중이다. 폭스는 제작비를 다 대고, 감독에게 창작에 관한 전권을 주는 대신 영화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갖는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시나리오를 확보해 다른 나라 또는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인재 발굴도 주된 목표다. 올해 '버드맨'으로 아카데미상을 휩쓴 멕시코 출신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도 폭스가 현지 영화 제작을 통해 발굴했다. 폭스 관계자는 "당장 눈앞의 수익보다 관객 150만 정도를 목표로 한 중간 규모 작품을 꾸준히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한발 뒤진 워너브러더스는 더 적극적이다. 워너는 지난해 '인터스텔라' 등의 성공에 더해 독일과 일본의 현지 프로덕션 영화들이 현지 시장에서 흥행하면서 2년 연속 3억달러 넘는 세계 박스오피스 매출을 기록했다. 전 세계에서 총 1억5700만달러(1700여억원)를 벌어들인 워너 재팬의 '바람의 검심'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본사가 전부 관리하는 폭스와 달리 아예 한국 프로덕션도 새로 꾸리고 있다. 중량급 한국 영화 제작자를 대표로 영입하는 협상도 막바지 단계다. 워너 관계자는 "올해 안에 중간 규모 작품을 크랭크인하고, 시일을 두고 대작들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약(藥)일까 독(毒)일까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제작자 A씨는 "할리우드의 본격적 투자가 시작되면 그동안 한국 투자사들이 시나리오나 캐스팅까지 지나치게 관여하던 관행이 많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CJ·롯데·쇼박스·NEW 등 4대 메이저가 '과점'하는 현재 시장 판도를 흔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다. 영화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시나리오로 만들어내는 개발 과정이 중요한데, 이 비용을 적극적으로 지불하는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기대도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김현수 정책연구부장은 "할리우드 메이저의 배급망을 타고 우리 영화가 아시아·북미로 나가 성공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면서도 "꼭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선 영화가 수익을 낼 경우 제작사에 대개 40%의 지분을 주지만, 할리우드는 투자사가 모두 갖는다. 시장 규모가 작은 한국에선 중소 영화사들이 먼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는 "한국 영화란 무엇인지, 한국 영화 산업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근본적 재정의도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영화 시장 분석가 김형호씨는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한국과 외국 영화를 구분해 소비하지 않는다. 물량 공세나 대작 위주 경쟁이 벌어지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반면 폭스 관계자는 "한국 영화 시장은 이미 자본의 국적을 따지는 게 무의미한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