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3월 5일 창간 이후 조선일보는 '인재의 용광로'와도 같았다. 민족주의자 이상재·신석우·안재홍·조만식·장지영, 사회주의자 박헌영·김단야·임원근·김재봉·조봉암, 소설가 심훈·염상섭·현진건·김동인·이광수, 시인 이육사·김동환·주요한·백석·김기림이 모두 조선일보 기자나 임원을 지냈다.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근대사와 항일운동사·문화사의 일부였다.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필화 사건으로 9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을 복역했으며, 사장 신석우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처음으로 제정했다. 사장 이상재는 좌우 합작 단체인 신간회를 주도했다. 창간 기자 방한민은 총독 암살을 기도하다 13년 동안 수감됐다.

부사장 이광수, 학예부장 염상섭·김동인·김기림, 사회부장 현진건, 출판부 기자 백석, 대구 지국 기자 이육사의 소설과 시는 한국 문학의 큰 자산이 됐다.

이들의 맥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조선일보를 '대한민국 1등 신문'으로 우뚝 서게 하는 데 기여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유봉영은 광복 후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주필·부사장을 지냈다. '홍박'으로 불린 홍종인은 광복 직후 편집국장을 맡아 신문 재건에 큰 역할을 했다. 최장수 편집국장 성인기는 1950년대 어려운 시절 신문의 중심을 잡았다. 4·19와 5·16 당시 사설을 통해 권력에 저항했던 최석채는 IPI(국제언론인협회)의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에 선정됐다.

한국 문학사를 장식한 문인 선우휘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불리며 칼럼을 통해 필봉을 휘날렸다. '역사학계의 기린아'로 불린 천관우는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윤주영은 군사정부의 조·석간 택일 요구에 조간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관철했다. '한국학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이규태는 23년 동안 6702회 연재한 '이규태 칼럼'으로 한국 언론 사상 최장수 칼럼 기록을 세웠다. 신동호는 1970년대 초 사회부장을 맡아 온갖 사건·사고를 파헤쳤고, 김용원은 '쉬운 경제면'의 개혁을 주도했다.

대표적 칼럼니스트 중 한 사람인 류근일은 '정권의 적, 공공의 친구'로 불렸다. 1980년대 초 편집국장이 된 최병렬은 뛰어난 추진력으로 유명했으며, 그다음 편집국장 안병훈은 잇따른 특종과 증면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두 차례 편집국장을 지낸 인보길은 신문의 컴퓨터 제작을 정착시켰다. 김문순은 경제 뉴스를 별도 섹션으로 분리했고, 변용식은 TV조선 설립을 진두지휘했다.

직언 직필의 대표 논객 김대중(현 고문)과 '지식 컨테이너'라 불리는 강천석(현 논설고문), 대표적 경제 논객 송희영(현 주필) 등은 현역으로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