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의 사하로프센터. 구소련 시절 스탈린 독재에 반대했던 인권운동가 겸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를 기념하는 건물이다. 러시아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지난달 27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55)의 추모식이 열렸다. 블라디미르 푸틴(63)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그는 크렘린궁(대통령 집무실)에서 불과 200m 떨어진 중심가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른 아침부터 넴초프의 사진과 꽃, 러시아 국기를 든 모스크바 시민 수천명이 좁은 추모식장을 가득 채웠다. 이들은 흰색 줄무늬가 그려진 관에 꽃을 바쳤다.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은 관에 든 그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밖에서 긴 줄을 섰다. BBC 방송은 "사람의 행렬이 수백m 이어져 끝이 안 보인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경찰은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고 검문검색을 강화하며 추모객을 통제했다.
추모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었다. 그 사이에는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도 있었다. 린케비치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과 파우릭 폴란드 외무차관 등 주변국 고위 인사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반면 폴란드의 보그단 보루세비치 상원의장과 라트비아의 산드라 칼니트 의원 등 넴초프를 지지하는 해외 인사들의 입국은 거부됐다. 현재 구금 중인 러시아의 대표적 야권 인사인 알렉세이 나발리는 추모식 참석을 위해 석방을 요구했으나, 법원이 불허했다.
넴초프의 유해는 모스크바 남서쪽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2006년 집권층의 부패, 체첸에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인권유린을 고발한 기사를 쓴 여기자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야권 지도자인 겐나디 구드코프는 로이터통신에 "넴초프 피살은 러시아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넴초프의 피살이 푸틴 장기 집권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서방과 대립각을 세우는 푸틴은 85%를 웃도는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2018년 대권 도전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러시아 야권의 활동은 미진한 편이다. AP통신은 "넴초프 피살이 숨죽이던 야권을 깊이 일깨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1일 넴초프 추모 집회엔 모스크바에서만 5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몰렸다.
지난해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촉발한 러시아·서방 간의 대립이 더 격화할 조짐도 보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일 "지난 수년간 퇴보한 러시아의 인권과 언론 자유가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외교 전문지 내셔널인터리스트는 "러시아 정부는 넴초프 피살 배후에 서방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며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고, 관계 개선을 위한 출구도 없다"고 보도했다. 서방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에 대한 추가 경제제재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