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베이징 특파원

중국은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음력설)를 앞두고 친척·친구·동료가 함께 저녁을 먹는 풍습이 있다. 이번 설에는 중국인 사업가 A씨의 초대를 받았다. 식당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한국처럼 서로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만 부른 줄 알았다. 그런데 식당에 도착한 20여명 중 기자가 아는 사람은 A씨와 그를 소개해준 한국인 사업가 B씨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참석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A씨와는 친분이 있지만 서로는 처음 보는 사이가 많았다. A씨 덕분에 베이징시 검찰 고위 인사, 상무부 국장, 유명 의사, CCTV 간부, 태국인 사업가, 20대 관상가 등과 인사를 나눴다. 국적·고향·직업·나이 등이 전혀 다른 사람끼리 설맞이 저녁을 함께 먹은 것이다. A씨는 "중국의 '관시(關係·연줄)'는 별게 아니다. 기회 있을 때 믿을 만한 사람을 서로 소개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인 참석자들은 이런 저녁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중국인은 국가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 '1942'는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대기근으로 3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허난(河南)성의 참상을 고발한다. 당시 공산당도 국민당도 인육(人肉)까지 먹던 국민을 돌보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대약진운동 때도 최대 수천만명이 아사(餓死)했다. 중국인이 관시를 중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보호할 '성(城)'을 스스로 쌓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인의 관시는 실용적이다. 고향·학교·정파가 같다고 무조건 관시를 맺으면 그 성은 약할 수밖에 없다. 능력과 신뢰 위주로 인재를 영입해야 성(城)이 더 크고 견고해진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

중국에서 관시가 가장 넓은 사람은 정치 리더일 것이다. 특히 '지도자[領導者]'로 불리는 공산당 정치국원(25명)이 되려면 적어도 20년 동안 중국의 2~3개 지방을 경험해야 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만 해도 1982년 허베이성 정딩(正定)현에서 지방 공직 생활을 시작해 2007년에야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복귀했다. 그 사이 허베이·푸젠·저장·상하이 등에서 다양한 관시를 쌓았다. 시중쉰(習仲勳) 부총리의 장남인 시 주석은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의 자제)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파워 엘리트 중 눈에 띄는 태자당은 시 주석 외에 왕치산(王岐山) 당 중앙기율위원회 서기 정도다. 시 주석의 '그림자 부대'는 태자당 외에 근무지였던 푸젠방(福建幇·푸젠성 근무 인맥)과 저장방(浙江幇·저장성 근무 인맥), 부친의 고향인 산시방(陝西幇·산시성 출신 인맥), 모교인 칭화방(淸華幇·칭화대 출신 인맥) 등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다.

이처럼 시진핑의 인재 풀도 '방(幇)'이라고 불리는 중국 특유의 패거리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 황제'가 된 것은 자기 사람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한 덕분이다. 그러나 '태자당 인사'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라는 비판은 반중(反中) 매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몽골족을 지린성 당서기에 임명하고, 위구르족을 국가에너지국장에 기용하는 등 소수민족을 파격 발탁했다. '관시'가 중요한 중국 정치도 인재를 폭넓게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