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린튼(왼쪽 사진) 선생이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 한국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의 지지를 호소한 기사(오른쪽).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다.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푸른 눈의 항일운동가'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 이름 인돈·1891~1960)의 3·1운동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미국 애틀랜타의 지역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 기사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제강점기 한국 현실과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쓴 글이다. 린튼이 1956년 세운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가 최근 교내 아카이브에서 이 기사를 발견했다.

린튼은 전북 군산의 3·1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 국권 회복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21세에 한국으로 건너온 그는 3·1운동 당시 28세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쫓겨났다가 광복 이후인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서학교를 운영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기사 제목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신문은 3·1운동을 '세계사(史)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린튼은 이 신문에 "3·1운동은 한국이 최초로 일본의 압제하에서 자국의 무기력함에 대해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첫 번째 시도"라며 "그것은 폭력 없는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3월 1일, 인구 30만 명의 수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 행진했다. 폭력과 무질서는커녕, 일본 정부가 군중을 해산하려고 할 때 저항조차 없었다. 그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을 뿐이다. (중략) 잡혀온 한국인들로 감옥에 더 이상 자리가 없자, 군부는 기병대대를 보내 수백 명의 한국인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하지만 여전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은 더 강한 군사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총검에 쓰러져갔다."

그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다. "한국의 운명은 동맹국가에 달려 있다"며 "파리평화회의는 3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말살해온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한국 국민의 봉기에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린튼의 손자인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분"이라며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자유독립을 위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