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이태원 작업실에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는 남현범.

먼 훗날 지금처럼 컴퓨터 앞에서 늙어갈 자신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래서였는지, 엉뚱하게도 뉴욕·밀라노·파리·런던의 길거리에서 만난 패션모델, 유명 디자이너, 디자인 전공 학생들의 패션을 찍은 '스트리트 패션 사진'에 눈이 갔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어딜 가려고 저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나왔지?' 호기심이 몇날 몇달이고 머릿속에 머물러 견딜 수가 없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카메라로 찍어야 했다. 2010년 여름 25세 젊은이가 세종대 공대를 중퇴하고 가진 돈 싹싹 긁어 밀라노 패션위크로 날아간 까닭이다. 패션위크란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패션쇼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주간을 말한다.

그 후 5년. 그 사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트리트 패션 사진가로 우뚝 선 남현범(30)이 사진집 '패션위크(FASHION WEEK)'를 냈다. 카메라 하나 목에 걸고 전 세계 패션쇼가 열리는 도시를 휩쓸면서 만난 사람들 모습을 300여 쪽에 눌러 담았다. 패션 사진이라고 해서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모델이 디자이너가 손수 재단한 고급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일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표지 사진부터 예상을 깬다. 손바닥만 한 거울에 슬쩍 비친 예쁜 여성의 얼굴. 그녀의 입가 한쪽이 위로 삐죽 솟아 있다. "러시아 출신 수퍼모델 안나 셀레즈네바예요. 프랑스 디자이너 이자벨마랑 쇼가 끝나고 스쿠터에 앉아 잠시 쉬고 있길래 백미러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을 찍으려고 다가갔죠. 순간 저를 알아챈 안나가 '썩소'를 날렸어요. 일반 상업 사진 속 그녀라면 우아함이 넘치는 표정을 지어줬을 텐데 말이에요." 서울 이태원 작업실에서 벙거지를 푹 눌러 쓴 남현범이 말했다.

'사진을 따로 배운 적 없고 패션과도 거리가 멀었던 부산 싸나이'가 국내 1세대 패션 사진가가 될 수 있었던 발판은 자신의 전공인 인터넷이었다. 개인 블로그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촬영한 길거리 패션 사진들을 올렸고, 하루 방문자가 3만여명에 달할 만큼 입소문이 났다. 1년 만에 계약을 제의해 온 첫 매체는 프랑스 보그. 이어 엘르, 바자, 마리끌레르 등 유명 패션 잡지와 웹사이트가 그에게 손 내밀었다. 프라다, 미우미우, 펜디, 토즈 등 한다 하는 브랜드와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지난해 파리 패션위크에서 남현범의 렌즈에 잡힌 일본의 유명 모델 미즈하라 기코. 그녀는 남현범에 대해 “평범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그의 엉뚱한 아이디어와 순발력은 평범한 주변 환경도 의미 있는 무언가로 보이게끔 한다”고 말했다.

패션 현장에선 제일 잘 차려입은 유명 모델에게 눈길이 쏠리기 마련. 그도 '처음엔 멋진 것만 찍었다.' "2010년 여름 프라다 패션쇼 주변이었어요. 머리 위에 머리 크기만 한 수박 장식을 단 패션 아이콘 안나 델로 루소가 등장했죠.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고 그녀는 '생큐, 생큐' 하고 가던 길을 갔어요." 당시 그는 너나 할 것 없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명사들 위주로 피사체를 골랐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수록 패션계 바깥에 머무는 일반인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옷차림이 현란한 패션계 인물도 여전히 찍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좀 더 주변의 '다른 주인공'에게도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패션쇼 앞줄에 지루한 얼굴로 앉아 멍하니 런웨이를 바라보는 명사들, 엉덩이가 훤히 드러난 짧은 치마를 걸치고 아무렇지 않게 주택가를 걷는 모델들, 그런 모델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백발의 노파, 노파 옆에서 후줄근한 속옷만 입고 무심한 척 멋쟁이들을 내려다보는 할아버지 등이 그 주인공이다. 그렇게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줄기차게 찍어온 B 컷 사진들이 이번 사진집에 고스란히 담겼다.

매체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진은 돈이 안 된다. 그럼에도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면서 각자 자기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보통 사람들을 계속해서 찍는 이유는 뭘까. 남현범은 "아름다울 거 하나 없는 민얼굴의 현실을 봤다. 그게 우리 삶이고, 그래서 재밌었다"고 했다. "패션이라는 게 패션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아요. 새 디자인의 프라다 구두도 멋지지만 그 옆을 바쁘게 스치는 출근길 여성의 때 묻은 구두도 아름답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