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R리조트에 사는 루(彔)모(42)씨 부부는 지난달 28일 오후 현대차 맥스크루즈를 몰고 제주 한림의 작은 칼국숫집을 찾았다. 테니스를 치고 온 두 사람은 캐주얼 차림이었다. 신발을 벗고 온돌 바닥에 자리 잡은 부부는 닭칼국수와 불고기를 시켰다. 루씨의 남편 C(43)씨는 된장국을 두 번이나 더 시켜 물 마시듯 들이켰다. 루씨는 "집 주변 작은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게 여기 사는 재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상하이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루씨 부부는 2013년 이곳에 왔다. "사업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접대하느라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어요."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었던 부부는 인터넷으로 여러 나라를 알아보다 제주도를 택했다. 아내 루씨는 제주도 국제학교에 입학한 딸(9)·아들(7)과 지내고 남편 C씨는 한 달에 15일을 제주도에서 보낸다. 남편 C씨는 "회사도 틀이 잡혔고 인터넷도 발달한 덕분에 한국에서 일을 봐도 문제없다"고 말했다.
아내 루씨는 "우리의 일상은 조용하고 안락하다"고 했다. 오전 8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루씨는 테니스나 골프를 친다. 남편 C씨가 집에 남아 두 시간 정도 회사 일을 하는 동안 루씨는 지역 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운다. 수업이 끝나면 문화센터나 시내에서 비빔밥, 국수, 찌개 등으로 점심을 한다. 오후엔 부부가 함께 국제학교에 들러 아이들을 데리고 와 숙제를 봐주고 저녁을 함께 먹는다. 해가 지면 헬스, 산책을 즐긴다. 가족끼리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도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이다. 남편 C씨는 "제주도 밤 문화는 아직 한 번도 즐겨본 적도 없고 사실 갈 곳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부부가 중국 금융 회사의 관리직으로 일하는 우(吳)모(40)씨 내외가 제주도를 택한 사연도 비슷하다. 우씨는 "금융업은 원래가 스트레스가 극심한데 최근 몇 년간 증시가 크게 요동치면서 나와 남편 둘 다 수시로 새벽까지 일해야 했다"고 말했다. 우씨는 "여기선 뭘 하면서 놀지를 고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로 치면 수십억~수백억 자산가인 '푸이다이(富一代)'들의 제주 생활은 유흥이나 관광, 떠들썩한 쇼핑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제주도에서 원하는 것은 오히려 돈으로 살 수 없었던 삶의 방식이다. 다롄에서 전자업체를 하는 리(李)모(43)씨는 "사업하는 20년 동안 일요일이 없었다. 중국에서 돈 번 사람들은 다 일요일 없이 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리씨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공을 향해 달려온 푸이다이들에게 제주도는 경쟁과 압박에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느린 삶'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상하이에서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천(陳)모(58)씨는 매달 한 번씩 평균 10일간 제주도에 머무는 생활을 2년째 이어오고 있다. 제주도 생활 목표를 '양생(養生)'으로 삼은 그는 제주 동문시장,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제주 민속오일시장 등을 찾아다니며 갈치·옥돔·전복 등 해산물을 직접 사와 집에서 요리하는 게 취미다. 천씨는 "F2(거주) 비자 때문에 '범죄경력회보서'를 떼러 경찰서에 갔는데 상하이 경찰과 달리 커피까지 타 주며 친절한 태도를 보여 감동했다"면서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제주도에 오지 않으면 몸살이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다롄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자오(兆)모(53)씨도 '슬로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서귀포의 180㎡(약 55평)짜리 리조트를 8억원에 구매한 뒤 지금까지 10차례 제주도를 찾았다. 그는 "식사와 술접대 자리, 회의와 결재할 서류가 넘쳐나는 중국에서는 이런 호사를 누리기 어렵다"며 "좋은 공기 마시며 푹 쉬다 보면 미세 먼지에 찌든 폐가 세척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제주도의 리조트에는 한 곳에 많으면 수백명의 푸이다이가 살지만, 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볼 수 없다. 푸이다이들 사이에선 서로 사생활이나 개인사·가정사를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푸이다이들의 '차이나타운'은 온라인상에서 익명으로 존재할 뿐이다. 다롄에서 온 리(李)씨는 "QQ(중국판 네이트온)에 리조트 주민 200명 정도가 가입돼 있는데 모두 닉네임으로만 대화하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모른다"며 "사업 파트너가 되지 않는 이상 출신·직업·이름 등 개인 정보는 공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익명 채팅방에서는 주로 제주도 생활 정보, 국제학교 정보 등을 공유한다. 서귀포 한 리조트에 사는 A씨도 "실제로 어울려 지내는 사람은 3~5명뿐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