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뒷굽을 갈려고 들어갔다가 박흥옥(62)씨를 알게 됐다. 서울의 중심이랄 수 있는 광화문(光化門)에서 48년째 구두를 닦아왔다고 한다. 내 근무처 바로 이웃에 있었는데도 여태껏 몰랐다.
"여기는 단골손님만 오는데 작년 봄부터 반 토막이 됐다. IMF 시절 다들 어렵다고 해도 구두 닦는 사람이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캐주얼화(靴)를 신는 유행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성들 호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게지."
그러면서 휴대폰 DMB로 시청하던 이완구 총리 후보 뉴스에 촌평(寸評)도 곁들었다.
"저런 분들은 땅을 샀다 하면 개발되거나 도로가 뚫리는데 우리 같은 머저리는 한 번도 그런 행운 근방에도 못 가보고 살았네. 멍청한 놈이라 남의 냄새 나는 구두만 닦다가 평생을 보냈다."
그의 살아온 얘기도 한번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5남4녀의 여덟째였다. 그가 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5일장을 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새벽 2시쯤 일어나 동네 국밥집에서 10원짜리 시래깃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떠났다. 그걸 알고는 내가 국밥집까지 따라가 슬그머니 곁에 앉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이 먹어야 할 국밥을 말없이 내 쪽으로 밀어줬다. 어머니는 굶고서 먼 길을 간 것이다. 그걸 깨닫자 나는 철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돼야 할 1966년, 설날 하루 전날 누나가 장롱에 넣어둔 곗돈 860원을 들고 나왔다. 새벽 기차를 타고 11시간 걸려 서울역에 내렸다.
"땅바닥 위에서 기차(전차)가 다니는 걸 처음 봤고, '브라더 미싱' 네온사인이 뱅뱅 도는 장면이 생생하다. 상경한 고향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터를 잡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여기로 왔다. 구두닦이의 똘마니로 여섯 달 일했다. 당시 음식점·다방·이발소에서는 '서비스'로 손님 구두를 닦아줬다. 그런 업소의 구두를 거둬오는 게 내 담당이었다. 그 뒤 종로 예식장에서 하루 80원씩 상납하며 하객들 구두를 닦았다. 한 켤레 닦는 데 10원이었다. 상경한 지 1년 반 만에 광화문 감리교회(현 동화면세점) 구내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부터 서울의 중심부를 선점했구나.
"지금처럼 큰 도로나 빌딩이 있지도 않았고 판잣집만 즐비했다. 좋은 자리였으면 어린 내가 어떻게 차지할 수 있었겠나. 전임자에게 권리금 3만2000원을 줬다. 지금의 내 구역을 산 것이다."
―내 구역이라니?
"우리끼리 그런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당시 구두를 닦다가 밤이 되면 그 자리에 종이를 깔고 누웠다. 추운 날에는 교회의 보일러실에 숨어서 자는 세월을 보냈다. 내 구두닦이 부스가 광화문 대로변에 자리 잡게 된 것도 48년간 여기서 붙박이로 지냈기 때문이다."
―구청 공무원들이 거리 단속을 하곤 했는데.
"무허가 도로점용이니 공무원을 만날 때면 가슴이 덜컹덜컹했다. (부스 안에 보관해둔 영수증철을 보여주며) 1991년에 처음 도로점용료 12만6000원을 냈다. 92년에는 56만원, 93년에는 71만8800원이나 받아갔다. 길바닥에 앉아 구두를 닦아 겨우 먹고사는 사람들한테 자기 마음대로 돈을 빼앗아간 격이다. 1992년 구두닦이 중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도로점용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해당 구청을 찾아가 '돈을 냈으니 허가증을 달라'고 했거든. 먹고사는 일이 늘 고생스러웠지만, 이 허가증으로 마음이나마 편해졌다."
현재 구두닦이 부스는 서울시에서 정한 규격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는 연간 사용료 52만원과 화재보험료 4만원을 낸다고 했다. 권리금을 받고 임의 양도를 못 하도록 구두 닦는 사람이 바뀌면 사용 허가가 취소된다.
―구두닦이 일은 언제 호황이었나?
"1970년대 초에는 똘마니 둘을 데리고 일했다. 서울로 올라온 누나 가족까지 먹여 살렸던 적도 있다. 100만원짜리 집 한 채를 사놓았을 때 징집영장이 날아왔다."
―초등학교도 졸업 안 했는데 현역으로 갔나?
"엉터리지. 고향의 읍사무소에서 내 징병서류를 보니 '나주중-인천고 졸업'으로 되어 있었다. 돈 먹고 다른 누굴 빼주고는 나를 대신 끼워넣은 것인지…. '내가 인천고 몇 회 졸업생인지나 가르쳐달라'고 하니, 병사계 직원이 '인천고 졸업은 지워주겠다'며 웃더라고. 나주중 졸업은 그대로 남았다. 지방 병무청 담당자가 '중학교를 안 다닌 확인서를 떼오면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중학교 교무실로 찾아가니 '안 다녔으면 그만이지 무슨 증명서를 떼주나'라고 했다. 결국 광화문 자리를 동생에게 맡겨두고 34개월간 군 생활을 했다."
―블랙코미디군.
"안 가도 되는 군대에 갔지만,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더라. 강원도 화천의 부대에서 연대장 당번병이 돼 시간 여유가 많았다. 연대장 방의 장식용 책을 꺼내 읽으며 졸병들을 불러 배우기도 했다. 군대 덕분에 바깥에 나와 제법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몇 년간 생활일기도 썼다. 당시 한 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냈더니 당선돼 50만원을 보내주더라."
―생활일기라니?
"당시 내가 구두 닦던 자리인 감리교회 건물이 헐렸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펜스 치고 공사를 하니, 구두를 닦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파출부 일을 나가 먹고살았다. 신세 한탄조로 생활일기를 쓴 것이다. 사람이 춥고 배고프니 글이 잘 쓰이더라. 다시 안정이 되자 쓰기 싫어지데. 청승 떨며 그렇게 쓸 이유가 없지."
내가 빙긋이 웃으니, 그는 한 술 더 떴다.
"예술가도 산전수전 어려움을 겪어야 좋은 작품이 나오지, 등 따습고 배부르면 좋은 작품이 안 나온다."
―광화문에서 집회와 시위도 많이 겪었을 텐데.
"1987년 민주항쟁 때는 '나라가 뒤집어지겠다' 싶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2008년 광우병 시위 때도 대단했지만 '그래 봐야 안 된다'라는 느낌이 들더라. 과거에는 세계 권투 챔피언을 따도 카퍼레이드를 했고, 미국 대통령이 온다고 해도 연도에 학생들이 동원됐다."
―그런 날에는 하루를 허탕치는 것인데.
"군중 틈에서 같이 구경했다. 누구든 역사 속에서 묻혀 가는 것인데 하루 돈 더 벌고 따질 일 아니지. 시대의 아픔을 함께해야지. 살아보니 세상은 공평한 것 같다. 나도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반면에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었지 않겠나. 내가 피해를 많이 봤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내게 감사하는 마음이 적어서 그런지도 몰라."
―단골손님 중에 유명 인사도 있었나?
"많았지. 김영삼 대통령의 구두를 5년간 닦았다. 단골이었던 이병석 정무비서관(현 새누리당 의원)이 '청와대에 들어와 일할 생각 없나?'고 했다. 구두닦이 후보 16명을 신원 조회했는데 통과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원진술서를 쓰고 내가 일할 청와대 구내에 들어가 보고는 '안 하겠다'고 했다. 그때 뭔가 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 구두는?
"청와대 직원이 일주일에 두 번 YS 구두 너덧 켤레씩 들고 왔다. 당일 안 찾아갈 때가 있었다. 대통령 구두를 혹시 잃어버리면 큰일 나지 않나. 인근 광화문파출소에 사정을 말하니 무기고(庫)에 넣어주더라."
―어떻게 구두를 닦아야 잘 닦는 것인가?
"구두를 새것처럼 해놓는 것이다. 나는 구두약을 다 닦아내고 은은하게 광을 낸다. 바짓가랑이에도 구두약이 묻지 않는다."
―구두 한 켤레 닦는 데 얼마나 걸리나?
"제대로 하면 7분. 내가 세어보니 손 움직이는 횟수는 600번이더라."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고 하는데?
"당뇨 환자의 구두는 얼룩덜룩하다. 소변을 누면 조금이라도 구두에 튀는데, 당분(糖分)이 많으면 먼지가 더 달라붙기 때문이다. 물로 잘 안 닦이고 침으로 닦인다. 심장병이 있는 사람은 구두를 끌고 다녀 굽이 잘 안 닳고 보푸라기가 생긴다. 구두끈을 바싹 당겨 매는 사람은 성정이 바르거나 깐깐한 것 같았다."
―내 경우 구두굽의 한쪽만 잘 닳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팔자(八字)걸음이라 대부분 그렇다. 굽이 잘 닳는 것은 힘차게 걷기 때문이다. 닳아야 정상이지 안 닳으면 병든 거다. 굽에 징을 박으면 머리로 충격이 전달된다."
―YS 구두를 보니 어떠했나?
"이분은 끈 안 매는 똑같은 디자인의 국산 구두만 열 켤레쯤 됐다. 똑같은 구두라도 짝이 바뀔 수 있어 구두를 닦을 때 나만 알아보게 번호를 써놓았다. 한번은 어떤 손님의 구두를 닦다가 그 번호를 보고는 '대통령 구두를 신으셨네' 했더니 '어떻게 아느냐'며 깜짝 놀라더라. 대통령이 구두를 좀 신다가 청와대 직원들에게 내려줬던 모양이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나?
"군대 휴가 나와 만났다. 고등학교를 나온 미인인 데다 집안이 좋았다. 나중에 처가에서 내 직업을 알고는 시끄러웠다. 몇번 밥벌이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내가 배운 게 없으니…. 아내가 나 때문에 고통받은 게 많았다. 자기 친구들에게 '우리 신랑은 구두닦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아이들은 학교 다닐 때 아버지 직업란에 '노동'이라고 썼다."
그는 딸 둘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큰딸은 호주로 유학을 가 그쪽 남자와 결혼했다. 호주국립병원의 간호사로 일한다. 딸 가족을 보러 호주에 세 번쯤 다녀왔다고 한다.
―구두를 닦아 딸을 외국 유학까지 보냈으니 대단하다.
"그 아이 복(福)이지. 구두를 닦아 몇 푼 벌겠나. 작년 5월에야 은행 빚을 다 갚았다."
―이 정도면 선생 삶은 누구보다도 당당하지 않겠나?
"평생 경범죄 하나 저지르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구두닦이요'라고 떳떳하게 말할 분위기가 안 됐다. 구두닦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과연 나를 상대해주겠나. 옷 입고 나가면 허우대가 멀쩡해서인지 성당의 봉사단체에서 감투를 맡은 적 있었다. 내 근무처에 대해 알고 싶어들 했다. 결국 성당 다니는 걸 그만뒀다. 내 마음이 어떠했겠나. 이 나이가 되면서 좀 초월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