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다." 적어도 과거사 문제에서만큼은 메르켈 독일 총리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어 보인다. 최근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을 맞아 기념식에 참석한 메르켈 총리는 또다시 과거사를 반성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 언론은 이를 앞다퉈 보도했다. 연일 과거사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아베 일본 총리의 행태와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메르켈 총리의 과거사 반성은 정작 피해 당사국인 이스라엘에서는 더 이상 '뉴스(news)'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홀로코스트(2차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 19만명이 남아 있는 이스라엘의 언론은 메르켈 총리의 발언을 그다지 비중 있게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의 관심을 대신 잡아끈 것은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을 맞아 독일의 한 유명 싱크탱크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였다.
베텔스만재단이 18세 이상 독일인 100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평범한 독일인의 속마음은 지도자 메르켈 총리의 모범적 행보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응답자의 81%가 "홀로코스트의 장(章)은 이제 그만 덮고 독일 지도자들은 현재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답했다. 응답자 58%는 "이제 과거는 역사의 뒤편에 묻을 때가 됐다"고 했다.
응답자의 62%가 이스라엘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18~29세 젊은 층에서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응답자 68%가 "독일은 이스라엘에 군사적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고, 35%는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이스라엘이 과거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와 다를 게 뭐냐고 했다. 2007년 같은 문항의 조사 때보다 5%포인트 증가한 수치였다.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가해국 국민으로서 그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에 대해 속으로라도 이러한 마음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새 나치의 만행에서 비롯된 끔찍한 역사를 잊어버릴 만큼 독일인이 뻔뻔해진 것일까? 베텔스만 재단은 "독일인 시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고 분석했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군사 정책은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지역에 '반(反)유대주의'를 불러온 큰 이유 중 하나다. 누구보다 이스라엘이 이를 잘 알고 있다. 다만 강압적 팔레스타인 정책을 철회하기보다 홀로코스트를 앞세워 "역사의 최대 희생자인 유대인에게 유럽이 아직도 이럴 수 있느냐"고 항변하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아베 총리가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방문하며 과거사 물타기 '쇼'를 했다. 적어도 2차 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인 이스라엘이라면 아베 총리의 그런 모습에 뼈 있는 한마디쯤은 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 대통령과 총리, 언론 그 누구도 아베 총리 앞에서 과거사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서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