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우리 사회는 울화(鬱火)의 혈기(血氣)가 가득한 '울혈(鬱血) 사회'다. 이번 연말정산 파동이 그걸 증명한다. 공인(公人)들조차 울분을 감정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이 터질 때마다 핏대 높여 소리 지르지 않으면 무시하는 풍토가 사람들의 울화를 키웠다. '꼼수 증세'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들끓지 않았다면 무책임한 관료와 무능한 정치권이 지금처럼 발 빠르게 반응했을 리 만무하다.

부정부패와 불공정한 정부 정책이 사회적 울혈을 악화시킨다. 거대 공룡이 된 재벌의 법인세는 천문학적 액수를 줄여주면서 소시민과 직장인의 유리 지갑은 샅샅이 터는 정부의 행태는 사회 정의의 대원칙에 위배된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보듯 편법과 불법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현실이 우리 마음속의 좌절감과 분노를 부른다. 솔선수범은커녕 기본 상식조차 없는 상류층의 일탈이 보통 사람의 울화증을 악화시킨다. '땅콩 회항(回航)' 같은 '갑질'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태풍처럼 몰아쳤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울혈 사회의 확산을 말해주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최근 나왔다. 화병(火病)과 관련된 최신 자료가 그것이다. 한 취업 포털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화병을 앓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9할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다. 직장인들이 화병 원인으로 든 것은 '상사·동료와 맺은 인간관계에 따른 갈등'(64%)이 압도적이었고, 그다음이 '업무 스트레스'(25%)였다. 얼마 전 사회적 화제로 떠올랐던 '미생 신드롬'과 맞물리는 조사 결과이기도 하다.

경쟁과 긴장의 연속인 사회생활에서 갈등과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고 그렇게 억압된 분노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화병이 독특한 한국적 현상으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이다. 질병의 발생과 전개가 우리 사회 특유의 문화적 배경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정신 질환 진단의 교범(敎範) 역할을 하는 미국정신의학회의 1994년 '정신장애 진단 통계 편람'은 '화병(Wha-byung)'을 문화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한글 발음 그대로 싣고 있다. 화병이 동양의학 전통에서 나온 개념 같지만 중국·일본·북한의 전통 의학에서는 화병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다.

스트레스와 분노에서 온 울화가 쌓여서 가슴이 답답하거나 불면증·우울증 등으로 표출되는 화병은 원래 한국 여성에게 많은 것으로 진단되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집중적으로 조명한 히스테리 증상이 19세기 오스트리아 빈 사회의 상류층 여성에게 빈발(頻發)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화병은 개인 차원을 넘어 광범위한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변형되어 확산된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사회현상으로서 화병이 일상의 현실이 되어버린 울혈 사회에서 사람들은 쉽게 흥분하고 삿대질하며 '남 탓'을 일삼는다. 목청 큰 사람이 이기는 곳에 차분한 자기 성찰과 이성적 토론이 설 자리는 없다. 우리 사회가 항상 과열 상태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적 울혈을 추동하는 심리적 동인(動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억울함과 불공정성에 대한 분노다. 여기에 원망(怨望)과 한(恨)까지 보태져 한국 사회는 언제 집단적 울화가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벌 상속녀의 '땅콩 회항'과 국회의원의 '내가 누군지 알아?'는 한국적 울혈 사회의 화약고를 건드린 사회적 자폭 행위였던 셈이다. 물론 그들의 추락은 오만방자한 무자격자(無資格者)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이처럼 화(火)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당한 분노는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사회 진화를 앞당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집단 울혈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울화가 쌓여 피가 통하지 않아 더 버티기 어려운 상태다. 사회적 화병을 치료하는 조치를 국가·시민사회·개인 차원에서 동시에 긴급히 시행해야 하는 까닭이다.

국회는 부정부패를 줄일 '김영란법(法)'을 속히 통과시켜야 하고, 재벌은 탕감받은 법인세만큼 국내 투자와 일자리를 늘려야 하며, 대통령은 민심과 대적(對敵)하기보다 소통과 탕평 인사에 앞장서야 한다. 공정성과 공공성을 높이는 이런 최소한의 사회적 조치 못지않게 중요한 건 '스스로 삶 돌아보기'다. '남 탓'을 절제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 자족(自足)하는 마음의 습관이 화병을 다스리는 지름길이다. 결국 성숙한 시민 정신이 울혈 사회를 넘어서는 궁극적 해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