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할머니한테서 빨간색, 파란색 고추를 받는 태몽을 꿨습니다. 언젠가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국가대표가 될 거라고 믿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넣으니 눈물이 다 나네요."
한국 축구대표팀이 27년 만에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결승 무대에 오른 26일 이라크전 선제 결승골의 주인공 이정협(24·상주 상무)의 어머니 배필수(57)씨는 본지 통화에서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소감을 이야기했다. "경기 하루 전날 (이)정협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요즘 마음이 편안하고 컨디션이 최고조에 올라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밤 제 꿈에 정협이가 명함을 받는 꿈을 꾸었어요. 아들이 유명해지는 꿈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겠죠?"
이정협은 이번 대회가 낳은 최고의 신인 선수다. 울리 슈틸리케(61) 감독은 A매치 경력은 물론 연령별 대표팀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보지 못한 무명(無名)의 공격수 이정협을 파격적으로 발탁했다. 이정협은 지난 4일 자신의 A매치 데뷔전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었고, 아시안컵에서 두 골을 더 추가하며 A매치 6경기 3골을 올렸다. 월급 15만4800원을 받는 육군 상병의 동화 같은 성공 스토리 때문에 '군데렐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부산 당감초 도마뱀
이정협이 부산 당감초등학교에 다닐 때 별명은 '도마뱀'이다. 고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로 뛰었던 부모님의 피를 물려받은 이정협은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큰 키를 가졌으면서도 발이 매우 빨라 늘 '달리기 전교 1등'이었다. 이 때문에 이정협은 부산의 초등학교 감독들로부터 "축구부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아들을 운동선수로 키우려면 얼마나 큰돈이 들어가는지 알았던 부모님은 이정협의 축구부 가입을 반대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61)씨는 강원도와 부산을 오가는 시멘트 화물선 선원으로 일하면서 매달 2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았다. 이정협의 누나까지 네 가족이 생활하기엔 빠듯한 봉급이었다. 어머니 배씨는 "축구를 못하게 하려고 태권도 학원을 억지로 넣어보고, 차라리 게임에나 푹 빠졌으면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270만원짜리 컴퓨터를 사줬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정협을 키운 건 '라이벌' 지동원
이정협은 4년 전 아시안컵의 스타였던 지동원과 동갑내기 친구이자 먼 친척 관계다. 지동원의 아버지 지중식(56)씨는 "이정협의 아버지 이웅재씨와 나는 모두 추자도 출신"이라며 "할머니께서 늘 '사돈댁 아이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웅재씨도 "정협이와 동원이는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했다.
부산 덕천중을 거쳐 동래고(당시 부산 유스팀)에 입학한 이정협은 2008년 출범한 K리그 주니어(K리그 18세 이하 팀 리그) 무대에서 지동원을 만나게 된다. 고교 시절부터 키가 180㎝가 넘었던 이정협과 광양제철고(전남 유스팀)의 지동원(도르트문트)은 리그를 대표하는 장신 스트라이커였고 늘 비교 대상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쪽은 늘 지동원이었다. 광양제철고는 득점 감각이 뛰어난 지동원에게 패스를 집중해 골 찬스를 많이 얻었다. 2009년 광양제철고에 고교축구선수권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지동원은 이듬해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고, 2011 카타르아시안컵에서 4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정협은 아시안컵 출전에 앞서 본지 인터뷰에서 "이번 아시안컵에서 평생 큰 벽이었던 지동원을 넘어서고 앞으로도 대표팀에서 선의의 경쟁을 했으면 좋겠다"는 각오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