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하던 햇살을 구름이 막아서자 금세 손 곱고, 발 시렸다. 그러나 얇은 방석 위 양말 바람으로 선 중년 여성들은 미동(微動)도 않았다. 이윽고 108배(拜)가 시작되자 파도처럼 1000명의 '절 물결'이 넘실거렸다.

지난 9일 오전 충북 충주시 수안보 미륵세계사(주지 지윤 스님). 이곳은 절이 아닌, 절터다. 나말려초(羅末麗初) 마의태자(麻衣太子) 전설이 서린 돌무더기만 넓고 높다. 돌 다섯 개를 얹어 세운 높이 10.6m짜리 거대한 미륵불(보물 96호)이 있는 이곳에 전국 각지 번호판을 단 전세버스 25대는 순례객들을 토해놓았다. 호젓한 산길은 이내 '108산사 순례'가 쓰인 배낭 멘 순례객들로 넘쳤다. 배낭 내용물은 거의 똑같았다. 안내 책자, 사경(寫經) 책, 인근 부대 장병들에게 줄 초코파이 한 상자, 공양미 한 봉지, 그리고 바닥 깔개…. 2년 전 주지로 부임해 사찰 복원을 위해 노력하는 지윤 스님은 "아마 신라 말 창건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모였을 것"이라 했다.

5000명의 108배 - 지난 9일 월악산 미륵세계사를 찾은 108산사 순례단이 108배를 올리고 있다. 통일신라 말에 창건된 이 사찰은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높이 10.6m 석조 미륵불과 몸길이 1.9m짜리 돌거북 등이 노천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108산사 순례기도회(회주 혜자 스님)가 100번째 순례를 마쳤다. 순례는 지난 2006년 9월 당시 서울 삼각산 도선사 주지였던 혜자 스님이 '108개 사찰을 참배하고 108배 올리면서 108번뇌 소멸시키자'는 소박한 목표로 시작한 기도 운동. 매달 한 곳씩, 단순 계산으로도 만 9년 꼬박 걸릴 대장정이었다. "글쎄, 그게 되겠어?" 처음엔 반신반의도 많았다. 그러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랬다. 이제 겨우 여덟 번 남았다.

그사이 순례단은 기록에 기록을 포갰다. 도선사 신자 중심 1000여명으로 시작한 회원은 그새 5000명이 넘었다.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어 매월 한 차례 목·금·토요일로 나눠 사찰을 순례하게 됐고, 사찰 입구엔 그 동네 주민들이 나물과 과일 등을 들고 와 파는 즉석 장터가 열렸다. 중간에 합류한 회원을 위해 이미 순례한 사찰을 되밟는 '2기 순례'도 벌이고 있다. 그동안 선물한 초코파이가 390만개, 결연한 다문화가정은 193가정, '5일장' 아닌 '목금토 3일장'에서 회원들이 구입한 농산물이 약 26억원어치에 이른다. 웬만한 사찰에 순례단 방문은 그야말로 '빈집에 소 들어오는 격'. 지자체(地自體)와 단위 농협 등의 '모셔오기 로비'(?)도 벌어졌다. 혜자 스님은 농촌사랑운동본부 홍보대사가 됐고, 초코파이 제조사는 감사패를 보내왔다.

108산사 순례를 이끄는 혜자 스님(사진 왼쪽)과 순례하는 사찰 이름을 새긴 알을 꿴 염주. 현재 100알이 채워졌고, 전체 순례를 마친 참가자는 108알짜리 염주를 갖게 된다.

100번째 순례는 각별한 뜻이 있다. 그동안 혜자 스님이 펴낸 안내 책자에 실린 사찰을 순례했지만 미륵세계사는 책에 없는 곳. 하지만 혜자 스님은 '광복 70년, 분단 70년' 새해 벽두 순례지로 이곳을 골랐다. 이곳 마애불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 앞으로 절을 복원해야 한다는 점이 통일을 이뤄야 할 우리 민족의 숙제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 법문에서도 혜자 스님은 "이곳 부처님은 통일을 바라듯 북쪽을 바라보고 계신다. 올해는 통일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자. 그래서 당초 계획했다 미뤄진 금강산 신계사 등 북한 지역에도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동산에서 모셔온 '평화의 불'을 밝히자"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기도의 원력(願力) 덕분인지 순례단이 간 여러 곳에서 무지개가 떴다"며 "여기 미륵불은 발견 당시보다 얼굴 부분의 이끼와 때가 벗겨져 점점 깨끗해지고 있다. 전신(全身)의 때가 벗겨지는 날 통일이 된다는 신앙이 있는데, 올해는 때가 다 벗겨지길 기도하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