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파리 동부 뱅센 지역의 유대교 식품점 '하이퍼 코셔'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범이 벌인 인질극이 종료된 직후, 한 흑인 무슬림(이슬람 신자) 청년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 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이들은 이 가게 점원 라사나 바실리(24)의 얼굴을 보자마자 두 손을 맞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현지 언론은 순간적인 기지(機智)를 발휘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 바실리가 이번 사건의 진정한 '영웅'이었다고 전했다.

테러범 아메디 쿨리발리(33)가 가게에 침입해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한 이날 오전 바실리는 지하 1층에서 근무 중이었다. 총격 소리에 놀란 일부 손님이 지하로 뛰어내려 오자 그는 지하 냉장실 문을 열고 이들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이 2명을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바실리는 재빠르게 지하 조명과 냉장실 전원을 껐다. 그리고 놀란 손님들을 진정시켰다. 다행히 흥분한 쿨리발리는 이들이 냉장실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지난 9일 프랑스 파리 동부 뱅센 지역의 유대교 식품점에서 발생한 인질극 당시 기지를 발휘해 15명을 대피시킨 무슬림 점원 라사나 바실리(왼쪽). 10일 한 경찰관이 전날 인질극이 발생한 유대교 식품점 앞에서 추모객이 두고 간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오른쪽).

좁은 공간에서 4시간째 갇혀 있던 바실리는 사람들에게 함께 빠져나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들은 인질범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그대로 남겠다고 했고 결국 자신만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게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은 홀로 탈출한 바실리를 의심, 1시간 넘게 수갑을 채우고 조사했다. 신원이 확인된 그는 경찰에 가게 내부 구조와 현장 상황 등을 상세히 전했다. 이 내용은 이후 진압 작전에 결정적인 정보로 작용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바실리의 빠른 판단이 없었다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아졌을 것"이라고 전했다.

서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바실리는 2006년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온 이민자다. 4년간 사회적응 교육과정을 마친 그는 프랑스 국적 취득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이퍼 코셔'에서는 2011년부터 일했다. 무슬림인 그가 엄격한 유대교 율법에 따라 가공·판매되는 식품점에서 근무한 것이다.

바실리는 프랑스 방송 '프랑스24'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일하면서 나의 종교에 대한 어떤 비판도 받아본 적 없다"며 "가게 동료들은 나의 '두 번째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바실리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트위터에는 "바실리에게 즉각 명예 훈장을 줘야한다" "이번 사건의 영웅은 단연 말리계 무슬림인 바실리"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바실리의 이름을 따서 만든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현재까지 1만건 넘는 추천이 몰렸다. 하지만 바실리는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다.

그의 활약은 이번 테러로 인한 반(反)이슬람, 반(反)이민자 정서의 확산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