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덕동 사거리 뒷편에 있는 '청년장사꾼 감자' 간판의 생맥줏집에 들어갔다. 눈금 표시가 새겨진 500cc 비커에 나오는 생맥주 두 잔과 감자튀김 하나를 주문하니 9500원이다.
운동모를 쓴 콧수염 친구가 다가왔다. 그의 명함 앞면은 '김연석'으로, 뒷면은 '청년장사꾼'으로 꽉 채웠다. 서른네 살인 그는 '청년장사꾼' 공동대표다. 손난로 노점으로 시작해 2년 반 만에 점포 11개를 직영하게 된 '청년장사꾼'은 매스컴에서 청년 창업의 롤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
감자튀김을 먹으며 그의 이력부터 물어봤다.
"서울산업대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졸업한 뒤 지역 문화 기획을 하는 '감자꽃 스튜디오'에 취직했어요. 당시 정부의 전통시장 살리기 프로젝트인 '문전성시 사업'을 따냈어요. 저는 춘천중앙시장과 주문진수산시장에서 4년간 일했어요. 시장에서 공연과 축제를 벌이고 동아리를 만들어 교육도 시켰어요. 문화를 통해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려는 것이었지요."
―효과가 있던가요? 상인들은 차라리 그 돈을 개인적으로 나눠달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아세요? 정말 그런 말을 했어요. 상인들이 '너희가 여기 와서 열심히 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서 우리 장사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어요. 적지 않은 예산을 들였는데, 장사에 실질적 도움이 안 되면 그건 죽은 문화 기획이 아닌가. 내가 직접 상인 입장이 돼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예산 지원 기간이 끝나 '문전성시 사업'도 끝났어요."
얘기하는 도중 그의 동업자인 김윤규(29)씨가 합석했다. 그는 묻기도 전에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온갖 청년 문제를 다 갖고 있어요. 아직도 홍익대 전자전기공학과 학생입니다. 휴학을 많이 한 탓에 마지막 한 학기가 남아있어요. 최근 결혼해 육아 문제와 맞닥뜨릴 아이가 조만간 태어나죠. 전세살이를 경험하고 있고요…"
다섯 살 아래인 그가 사실상 '청년장사꾼'의 대표다. 이때부터 질문에는 김윤규씨가 거의 답변했다.
―둘은 인도 배낭여행 중 처음 만났다고 들었는데.
"8년 전쯤 인도 배낭여행을 하다가 형(김연석)을 만났어요. 그 뒤로 계속 연락을 해왔어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편지를 주고받고 면회도 와줬어요. 제대 후 진로를 생각해보니 대기업 스펙이 안 되는 거예요. 요즘 유행하는 계약직 '미생(未生)'처럼 되기도 싫었고요. '나는 장사로 성공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형에게 전화했던 거예요. 형도 직장을 그만두려던 시점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가게를 시작한 건가요?
"아닙니다. 친구 3명을 더 끌어들여 '청년장사꾼'이라고 이름 짓고는 6개월간 '노점 프로젝트'부터 시작했습니다."
―작명이 재미있군요.
"저희는 청년이고 장사하는 사람이니, 솔직하게 '청년장사꾼'일 수밖에 없죠. 첫 달에 각자 20만원씩 갹출해 '손난로 노점'을 했어요. 2012년 1월 1일 해돋이 축제에 10만명이 몰려든다는 포항 호미곶으로 내려갔어요. 손난로를 개당 360원에 떼서 2000원에 파는 거였죠. 손난로가 있으면 춥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영하 17도인데도 반팔을 입었어요. 또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반값 등록금' '난로 팔아 대학 가자' '청년 창업'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어요."
―아이디어가 참신한데, 다 팔렸나요?
"실패했어요. 한 휴대폰 업체가 마케팅을 위해 거기서 공짜로 손난로를 나눠주는 바람에…, 대기업의 골목 상권 침해를 몸소 느꼈어요(웃음)."
―저런…, 재고(在庫)는?
"손난로 1500개를 떼갔는데 1000개 이상 남았어요. 서울에 올라와 '명동 노점상들을 응원하자'며 친구들 50명을 불러내 노점상들에게 손난로를 나눠주는 행사를 벌였어요. 그다음 달에는 노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 기업의 잡지인 '빅 이슈(Big Issue)'의 거리 홍보와 판매를 했어요. 장사 연습하는 셈 쳤어요. 그때 방송사에서 '이런 청년들이 있다'며 보도해줬어요."
―노점을 해서 돈을 번 것은 아니군요.
"매출 수익은 없고 우리 돈만 쓴 거죠. 하지만 방송에 소개되니 '우린 뭘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여섯 달 뒤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형은 직장을 그만두고 저는 휴학했어요. 친구 3명도 합류했어요."
―모두 대기업에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인 친구들이었나요?
"직장에서는 볼 수 없는 인재들이죠(웃음). 취직 시험 준비를 하던 친구들이었지만, '이게 답이 아니다'는 깨달음이 있었던 거죠.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갈 게 아니라 내 발로 내 길을 얼마든지 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대학에 보내놓은 자식이 장사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작년까지도 그만두라고 하셨어요. 세상에는 장사를 낮춰 보는데 그런 편견을 깨보자는 마음도 있었어요. 창업이라면 고부가 가치 IT나 앱 개발 같은 것만 생각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청년이 몇이나 됩니까. 장사는 그런 능력과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창업입니다."
이들은 2012년 8월 처음 '창업'했다. 서울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 근처에 '사원 앞 카페'를 연 것이다. 계단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언덕배기의 외진 곳이었다.
―김연석씨를 빼고는 다 학생들이었는데, 자본금은 어떻게 마련했어요?
"제가 살던 원룸을 월세로 돌리고 전세금 5000만원을 빼냈어요. 하지만 서울 시내에 그 돈으로 점포를 얻을 데가 없었어요. 가장 싼 지역을 찾은 거죠. 4평 공간인데 보증금 1000만원에 월 40만원이었어요."
―왜 카페를 했지요?
"우리는 외식업을 해본 경험이 없었어요. 다만 한 친구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해본 경험이 있다'고 해서 시작한 거죠. 문 열고 일주일간은 장사가 잘됐어요. 그다음 손님이 딱 끊겼어요. 일주일 동안 우리 지인들만 왔고, 그게 끊기자 더 이상 올 손님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문을 닫았나요?
"투자된 돈이 있으니 쉽게 정리를 못 하고, '한 번은 더 해봐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어요. 형(김연석)이 부모님 집을 담보로 4000만원을 빌려왔어요. 카페는 한 명에게 맡겨두고 다른 가게를 물색하러 다녔어요."
두 달 뒤 서울 금천교시장(경복궁역 부근) 옆에 '열정감자'라는 감자튀김 전문점을 열었다. 5평 공간에 테이블 3개와 4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걸상이 전부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원룸 하나를 얻어 합숙했다.
―감자를 튀길 줄은 알았습니까?
"기술이 없으니까, 식감이 바삭한 고급 감자와 최고급 식용유를 썼어요. 매일 식용유를 갈았어요. 생맥주 맛도 따로 제조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날마다 생맥주 기계 안을 청소합니다. 잔류 생맥주는 그냥 버려요. 어떤 손님들은 맛 차이를 민감하게 알아차립니다."
―'규모의 경제학'이라는 게 있는데, 손바닥만 한 가게에서 팔아봐야 얼마나 되겠어요?
"주변 상인들도 '3천원짜리 팔아서 언제 돈 모아 장가갈 거냐'고 걱정했어요.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줄을 섰고 쉴 새 없이 감자를 튀겼어요. 한 달 6천만~7천만원씩 매상을 올렸어요. 가게 면적 대비 매상은 전국 톱 10위 안에 들었을 겁니다."
―특별히 장사 비결이 있었나요?
"어떻게 파느냐의 차이였지요. 가게 근방에 여중·여고·여대가 있었어요. 우리가 재미있게 하면 '테이크 아웃'으로 많이 팔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니폼 등판에 '잘생겨서 죄송합니다' '감자 살래 나랑 살래' '감자 팔아 대학 가자' '고객님 감자합니다' 같은 문구를 넣었어요, 우렁차고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어요."
―'열정감자'라는 상호가 잘 맞았군요.
"저는 '열정' '도전' '패기' '젊음' 같은 단어를 좋아하거든요. 친구들은 '촌스럽다'고 반대했지만 제가 밀어붙였어요. 하지만 이제 '열정감자'는 못 쓰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상표권을 빼앗겼어요. 2013년 8월 대학생 청년들이 대박을 터뜨린다고 방송에 소개됐어요. 바로 다음날 상표 브로커가 '열정감자'를 등록해버렸어요. 간판도, 사업자 등록도, 영업허가도 '열정감자'로 했는데, 무슨 상표권인가 했지요."
―법적으로 다퉜나요?
"법적으로 이길 수가 없어요. 더 진행되기 전에 간판을 바꾸는 걸로 했지요. 지금은 '청년장사꾼'이라는 큰 타이틀하에 '감자튀김' '꼬치' '골뱅이' 등으로 합니다."
―어떻게 점포 수가 이렇게 늘어났나요?
"우리가 방송에 나오자, '같이 일해보고 싶다'며 찾아오는 친구가 많았어요.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뭐 잘났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이 잘 먹고 잘살아보자'는 마음에 끌어안게 된 거죠. 원룸에 7명까지 함께 합숙했어요. 세면장에서 동시에 두세명씩 샤워도 했고. 문제는 5평짜리 가게 수입으로는 월급을 제대로 줄 형편이 못 됐다는 거죠. 전체 매출을 늘리려면 가게를 늘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2년 반 만에 모두 11개 가게에 직원 35명이 됐어요. 아르바이트 직원을 쓰지 않는 게 우리의 원칙입니다. 모두 정직원이지요."
―정직원의 혜택이 뭔가요?
"4대 보험이 되고 고용 안정성이 확보되죠. 직원들은 대부분 합숙소에서 지내요. 근무 시간(오전 10시~밤 11시)이 긴 데 비해 솔직히 봉급은 많지 않아요. 대신 직원들이 여기서 2년 일하면 '청년장사꾼' 간판을 갖고 나가 독립할 수 있어요. 저마다 장사를 선택했을 때 자기 가게의 사장이 되는 게 꿈이잖아요."
―로열티나 가맹료는?
"없습니다. 프랜차이즈처럼 식자재 공급도 안 하고 인테리어 비용도 안 받아요. 저희가 나서서 장소와 아이템 선정, 매장 인테리어를 도와줍니다. '청년장사꾼'의 열정과 패기를 이어가는 것이죠."
―또래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봅니까?
"저희는 아직 성공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누구에게 우리 따라 하라는 말은 못 합니다. 다만 자본금이나 기술력, 스펙이 없이도 한판 해볼 수 있다는 말은 해주고 싶어요."
내 나이가 미안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