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당시 30대 초반 젊은이었던 호세 무히카는 좌익 무장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서 활동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을 보면 평범한 시민들조차 단박에 그의 정체를 알아차릴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지명 수배자였다.

장례 행렬을 위장해 경찰 눈을 피했고, 카지노를 턴 뒤엔 카지노 직원들에게 훔친 돈의 일부를 나눠 주기도 했다. 타임지(誌)는 그가 속한 투파마로스에 '로빈 후드 게릴라'라는 별명을 붙였다.

네 차례 경찰에 체포됐는데 그중 한 번은 총격전을 벌이다 경찰이 쏜 총 6발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감옥에선 두 차례 땅굴을 파 탈출했다. 하지만 다시 붙잡혀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선 '콘도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좌파 인사 탄압이 한창이던 때였다. 14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1985년 출소한 뒤, 1989년 진보정당을 만들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2009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궁을 마다하고 교외 허름한 농가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은 총 14년간 감옥 생활을 마치고 1985년 출소했을 당시 모습.

'무장 게릴라 대원에서부터 대통령까지'. 이 같은 굴곡의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 바로 호세 무히카(80) 우루과이 대통령이다. 브라질 일간 폴랴 지 상파울루는 2월 말 임기가 끝나는 무히카 대통령의 전기 '조용한 혁명'이 우루과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우루과이 언론인 마우리시오 라부페티가 쓴 이 책에는 무히카 대통령이 게릴라로 활동했던 시절과 감옥 생활 회고담, 세상에 알려진 자신의 소문에 대한 대통령 본인의 증언 등이 담겨 있다. 조만간 10여개국에 번역될 예정이다.

책이 인기를 끈 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내용뿐 아니라, 무히카 대통령의 높은 국민 지지도도 한몫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분석했다. 무히카 대통령은 외신에서 '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대통령' 혹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일컬어진다. 책에도 그런 검소한 면모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무히카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주고, 자신은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서 아내가 소유한 농가에 거주한다. 작년에 그 집을 찾아가 인터뷰한 영국 가디언지(紙)는 외관을 이렇게 묘사했다. "단층집은 나뭇잎으로 반쯤 가려져 있고, 겨울비가 군데군데 흔적을 남긴 회반죽 벽이 양철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재산 목록에 기재된 전 재산은 농기구 몇 개, 트랙터 두 대, 28년째 손수 몰고 다니는 연한 하늘색의 1987년형 폴크스바겐 비틀이 전부다. 작년 6월 볼리비아에서 열린 개발도상국 그룹 G77 정상회의 기간에 한 아랍 부호가 이 유명한 자동차를 100만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매달 받는 월급(약 1300만원)의 약 90%는 사회복지 단체와 소속 정당에 기부한다. 그는 회의 석상이나 여러 인터뷰에서 "나는 가난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삶에는 가격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무히카 대통령은 재임 기간 5년 동안 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꾀했다.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고,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동성(同性) 결혼도 인정했다. 하지만 작년 6월 브라질 일간 에스타두 지 상파울루 인터뷰에서 그는 "그 어떤 것도 빈곤과 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빈곤을 줄이고 노동 기회를 늘린 점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들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노동자 최저 임금은 50% 인상됐다.

앞으로 한 달여 남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면 그는 상원의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히카 대통령의 현재 지지율은 2009년 11월 대선 투표 당시 득표율(52%)보다 높은 65%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