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파릇파릇 풀이 돋은 무덤가에서 뛰어놀았다. 마을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곡을 하며 상을 치렀다. 그때 우리에게 죽음은 자연스럽고 익숙한 무언가였다. 서울대 간호대 졸업 후 대형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그런 관념이 무너졌다.

실습 중의 일이다. 선배 간호사의 감독 아래 앙상하게 마른 말기 암 환자의 엉덩이에 근육주사를 놓았다. 오랜 투병 끝에 뼈만 남은 환자였다.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바늘 끝이 뼈에 닿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워낙 살이 없어서, 주삿바늘을 견딜 만한 근육조차 없었다.

똑같은 말기 암 환자라도 마지막 나날의 삶의 질은 크게 다르다. 서울 시내 A병원 중환자실(위)에서 만난 환자들은 의식 없이 수많은 호스를 꽂고 있었다. B병원 호스피스 병동(아래)에서 만난 환자들은 낯선 기자에게 야윈 얼굴로 환하게 웃어보였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이런 경험은 아주 흔한 일이 됐다. 말기 환자에겐 평범한 간호 행위도 엄청난 고통이 될 수 있다. 말기 환자는 장기간의 치료로 피부부터 뼛속까지 바스러질 듯 약해져 있다. 돌려 눕히고 일으켜 세우는 작은 힘에도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부러진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의료진이 온몸의 힘을 실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장면을 수없이 경험했다. 2시간 넘게 씨름한 경우도 있다.

심장이 다시 뛰게 만든다 한들 그 환자가 살아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질문은 입 밖으로 안 나왔다. 말기 환자가 중환자실에 입원한다는 건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해달라'는 말이다. 그때 우리 의료진의 최대 관심은 모니터에 뜨는 바이털(vital) 사인이었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본 삶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환자들은 모두 병상 위에 누워 있거나 묶여 있었다. 의식이 없거나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워했다. 말기 암으로 인한 고통이 큰지, 연명치료로 인한 고통이 큰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켜보는 가족들도 피가 말랐다. 가족은 조금 더 잘해드리고 싶어서 혹은 잘 모르고 환자를 중환자실에 모신다. 연명치료 과정에서 가족들이 느낀 아픔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됐다.

'고통을 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의료진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처치를 할 때마다 손끝으로 혹은 바늘 끝으로 느껴지는 날 선 감각에 함께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긴 갈등 끝에 나는 4년 전 사표를 냈다. 지금은 주기적으로 서울 후암동 모현가정호스피스에서 가정방문에 참여하며 호스피스 실무를 익히고 있다. 이곳에서 의료 행위는 통증과 불편한 증상을 없애는 최소한의 처치에 국한된다. 당연히 의례적인 검사도, 연명치료도 없다. 대신, 환자들이 통증을 다스리면서 편안하게 마지막 나날을 보내도록 돕는다. 가족과 화해하고 자기 인생도 돌아보시도록 환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눈다.

이곳에서 만난 말기 암 환자들의 마지막은 중환자실과 전혀 달랐다. 의료인인 나에게도 새롭게 여겨지는 사실이 많았다.

첫째, 말기 암 환자가 임종 전까지 대부분의 시기를 자기 힘으로 걸어 다녔다. 둘째, 의식도 있고 말씀도 하셨다. 대부분의 환자가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셋째, 대부분의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였다. 때로 불안해하고 흔들리지만 종국엔 따뜻하게 가족과 작별했다.

중환자실에서 본 말기 암 환자들은 삶의 마지막 나날이 사실상 없었다. 그런 기억이 괴로워 가족은 하루빨리 고인을 잊으려 했다. 호스피스 환자들에겐 마지막 나날이 '새로운 삶의 기회'였다. 가족들과 못다 한 말을 하고 응어리를 풀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몇 달이 일생 중 가장 애틋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유족들은 "슬프지만 행복했다"며 고인을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