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지, 특히 남성지에는 성(性)에 관한 칼럼이 있다. '코스모폴리탄'이나 'GQ' 같은 잡지에 등장하는 이런 섹스 칼럼에는 다양한 사람의 사례가 나오는데,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아무래도 타자화한 나 자신의 이야기나, 예전에 주변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재생하고 편집하는 것으로 기사를 마무리할 때가 있다. 이 얘기의 핵심은 이런 칼럼에 K, L, M, J 등 이니셜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분신이거나 감춰둔 욕망일 수 있다는 뜻이다.
패션지의 피처 에디터로 일하던 시절, 막 입사한 후배가 '기지촌 여성 인터뷰'라는 파격적인 기획안을 낸 적이 있다. 그녀의 기획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기획안 자체는 내 기억에 꽤 오래 남았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꽤 다양한 잡지가 있었는데, 한 남성지에서 일하던 친구의 직장 이력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가 다니던 잡지의 이름은 '열혈남아'였는데 홍콩 영화 제목 같은 이 잡지의 목차만 봐도 잡지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북한 꽃미녀 꾀기, 한국의 접대 문화, 집창촌 투어 가이드…. 한마디로 '열혈남아'는 '플레이보이' 하위 버전이었던 셈이었다. "우리 잡지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건 북한 꽃미녀 꾀기 시리즈였어. 어느 대학교 북한학과 학생들까지 초빙해서 세미나도 열고 분석해서 쓴 매우 심도 있는 기획 기사였거든."
마감 중이라 다크 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그는 외설 잡지 세 팀이 모여 외설 문화에 대한 세미나를 벌였다는 얘기를 무슨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15세 이하 열람 금지 등급 팀인 '맥심', 19세 이하 열람 금지 등급 팀인 '열혈남아', 딴지일보의 '남로당'까지 합세한 대단한 세미나였다는 것이다. 그의 얘기를 통해 나는 남자들의 욕망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동시에 이런 잡지들이 오히려 여자의 욕망을 도외시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다. 여자의 진심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한 남자가 어째서 여자들이 값비싼 핸드백에 광적으로 흥분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여자의 욕망을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엘르'는 성에 관한 조금 다른 지점의 이야기를 시도한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성공한 여자인 안느. 프랑스 패션지 '엘르'의 에디터로 일하는 안느는 인터뷰를 위해 여대생 샬롯과 알리샤를 만난다. 두 명 다 학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를 시작한 파리의 대학생이다. 안느가 취재를 위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두 여자와 마주쳤을 때 그녀가 던지는 최초의 질문은 사실상 '질문'이라기보다는 '질타'일 수도 있다. 별수 없이 그녀의 질문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 죄책감이나 모멸감은 없는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느의 예상과 달리 이들은 다정하고 해맑기까지 하다. 가령 남자와 이런 관계를 맺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묻는 안느의 말에 샬롯은 "느낌을 믿으니까 위험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더 흥미로운 건, 지금의 남자 친구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예상 밖의 대답이다. 그녀의 얘기 속에 등장하는 '손님'들은 이상한 남자가 아니다. 멀쩡한 직업을 가진 예의 바른 그들은 잠자리 후 나체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실패한 예술가이며, 어린애 같은 짓을 하고 싶어 하는 덜 자란 성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내와 관계에 문제가 있는 평범한 얼굴의 중산층 남자인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여자 알리샤는 안느에게 이렇게 말할 줄 안다. "술 마실래요?" 일할 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안느를 무장해제하는 시점은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할 때다. 폴란드에서 유학 온 가난한 여자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그녀는 꽤 담담히 말한다. 게다가 '불법'이란 말이 가진 음란함은 사실 그녀들만 짊어져야 할 말이 아니다. 섹스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중지시킨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돈이 필요한 지금, 이곳, 파리의 대학 생활이니까 말이다.
취재를 위해 들른 호텔 방에서 안느는 결국 알리샤와 술을 마시고, 볼이 미어터지도록 국수를 먹고 춤을 춘다. 자신이 처음 생각하거나 의도했던 것과 너무 다른 방향인 셈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희열과 균열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상사들을 위해 온종일 요리하던 어느 날,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서 어떤 환상을 보게 된다. 근사하게 차려입고 예의 바르게 음식을 먹고 있지만 맨몸뚱이로 여자를 탐하고 즐기는 허랑방탕한 인간의 민얼굴들 말이다. 안느는 그동안 감춰두었던 어떤 욕망과 불현듯 마주한다. 풀리지 않는 원고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는 순간,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나 권태기에 이른 남편과도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애초에 이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남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한 여자의 하루가 이 영화의 시작인 셈이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울프의 소설처럼 영화도 안느의 의식을 좇아 그녀의 변화하는 내면 풍경을 섬세히 살핀다. 이 영화의 감독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는 실제 성매매를 하는 여대생을 취재했다. 그리고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와 달리 이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존감이 높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영화 속 '안느'의 내적 분열은 아마도 취재를 감행한 감독 자신의 실제 상황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에서 욕망의 풍경을 엿보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뜻밖으로 많은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던졌던 사소한 질문에 대하여…. 여자들은 왜 비싼 핸드백에 목맬까? 이 욕망의 근원을 남성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이렇다. 핸드백은 여자의 자동차다. 이 말을 확장하면 이런 문장이 성립한다. 쇼핑이 곧 여자들의 축구 게임인 것이다.
●엘르―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 감독 영화, 쥘리에트 비노슈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