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문석(花紋席)은 1980년대만 해도 신부들이 챙겨 가는 고급 혼수품으로 인기였다. 여름에는 대나무 자리와 달리 땀이 차지 않아 상쾌하고, 겨울에는 보온 효과가 있어 사철 쓰는 생활용품이었다. 정부에서 외국 대사에게 보내는 선물로도 애용했다.
화문석은 강화산을 으뜸으로 친다. 재료인 백색 왕골(완초·莞草)의 주산지가 강화이기 때문이다. 바닷바람 맞고 자라 질기고 색도 맑다. 화문석은 송나라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 색이 섞여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해 놀랍다'고 했다.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인삼과 더불어 주요 수출품이었다. 고려 중엽부터만 쳐도 800년 역사를 가진 셈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생활이 입식(立式)으로 바뀌고, 화문석 자리를 카펫이 차지하면서 찾는 이가 줄었다. 지금은 부유층의 장식용이나 한옥에 들이는 정도다. 그들이 알음알음 찾는 이가 한순자(68)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6호 초고장(草藁匠)이다. '초고장'은 왕골로 돗자리나 생활 소품을 짜는 사람이다. 그는 강화 화문석의 맥을 이어 5대째 왕골을 짜고 있다. 왕골 공예 부문에서 유일한 대한민국 명장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화문석 짜는 틀을 '골병틀'이라고 했겠어요? 양반다리 하고 고개 숙인 채 몇 시간씩 일하니 관절염이나 소화 장애가 생기기 십상이죠.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도 나 스무 살 때까진 안 가르쳐주려 했어요. 하지만 피가 어디 가나요? 6남매 중 손재주 있는 제가 이어받았죠." 한순자는 스물일곱에 서울로 시집오며 직접 짠 화문석 한 장을 기어코 얹어 왔다.
지금은 아들 최준영(41)·최재영(38)이 20년 넘게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골병들 일을 두 아들에게 시키는 이유는 뭘까? "100명 가까운 제자 가운데 제일 오래 남은 게 아들들이네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시작해 아들 둘까지 합세했으니 우리가 세월을 같이 엮어가는 거지요." 그는 "열 살 전부터 어깨너머 익힌 기술로 왕골을 엮어왔는데 늘 재밌었다"며 "그래서 자식에게도 물려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순자가 일곱 자(2m10㎝)짜리 화문석을 아들 하나와 엮으면 보름 정도 걸린다. 틀 앞에 나란히 앉아 종일 일해도 서로 말 한마디 없다. 달그락달그락 고드랫돌(왕골을 당겨주는 추)만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단순 작업 같아 보여도 도안(圖案) 없이 머릿속 무늬를 바로 손으로 표현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현대미술을 전공한 큰아들과 의견 차이가 있을 때도 많다. "저는 기하학적 무늬를 넣어보는데 어머니는 못마땅하신 거죠. 기술이야 아직 어머니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디자인 결정할 때는 많이 싸워요." 큰아들이 웃었다. 작은아들은 또 다르다. "예술 감각 있는 형과 달리 저는 사업하고 싶어 경영학과에 갔어요. 어려서부터 화문석 만드는 법은 배웠지만 사업 욕심도 버리지 못했죠. 왕골 공예품 판로를 궁리하면서 타협해가고 있어요."
세 모자(母子)는 이렇게 암묵적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하지만 왕골을 고를 때는 함께 나선다. 물려받은 강화 200평 밭에서 한 해분 왕골을 직접 기른다. 봄에 심어 여름에 수확한다. 딴 왕골을 새벽이슬에 적시고 낮볕에 말리기를 거듭하면 녹색 빛이 하얗게 바래간다. 그렇게 말린 왕골을 밤에 친척·이웃이 둘러앉아 쪼개고 다듬는다.
"좋은 왕골은 매끈하고 윤기가 있어요. 완성된 재료는 하얀빛이지만 화문석을 만들어 사람을 타면 누레져요. 용·매화·학·나비같이 화려한 문양을 짜 넣지만 세월과 함께 풀의 자연스러운 색이 나올 때만큼 아름답진 않아요. 여기다가 왕골 특유 풀내음, 그리고 몸을 뒤척일 때 사각거리는 소리와 부드러운 감촉이 더해지면서 시각·후각·청각·촉각을 다 만족시키는 거죠."
화문석은 대개 일곱 자(200만원)짜리를 짜는데, 둘이 앉아 한 달에 두세 개 만든다. 장인이 몇 명 남았는지는 "전혀 가늠할 수 없다"고 했다. 가내수공업인 데다 판매도 알음알음 식이기 때문이다. 한씨가 나고 자란 강화도 양오리는 1970년대만 해도 50가구 대부분이 화문석을 짰지만 지금은 두 집 남았다. 그는 "노인들은 이제 왕골 기를 기운도 없고, 젊은이는 공장이나 품앗이가 차라리 벌이가 낫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