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일 한 아마추어 야구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전국 고교 야구 특기생들의 대학 합격자 명단이 공개됐다. '대학 진학 및 프로 신고선수 현황'이라는 제목의 명단에는 프로 구단에 입단한 고교 선수들과 함께, 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 등 야구 특기생을 뽑는 30개 대학 합격자들의 이름과 출신 고교, 포지션이 적혀 있었다. 명단이 나온 건 각 대학의 수시모집 원서 접수를 일주일이나 앞둔 시점이었다. 합격자는커녕 누가 어디에 지원했는지도 알 수 없을 때였다.
대부분 대학에서 야구 특기자 합격 발표를 마무리한 2일 조선일보가 해당 대학과 학부모들을 통해 확인한 결과, 석 달 전 떠돌던 합격자 명단 적중률은 90%가 훨씬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 내정자 명단을 본 서울의 한 대학 입학 관계자는 "1명을 제외하면 내정자 명단과 합격자 명단이 정확히 일치한다"며 놀라워했다. 다른 대학들은 명단 확인을 거부했지만 내정자 명단을 본 서울의 고3 야구 선수 학부모들은 "합격자와 90% 이상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부모들끼리는 누가 어디에 합격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원서도 내기 전에 합격자 명단이 돌고 이 명단이 실제 합격자와 일치하는 기막힌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고3 야구 선수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이르면 3월, 늦어도 8월이면 누구를 어느 대학에 보낼지 정해진다"고 말했다. 이 학부모는 "각 팀 감독이 선수마다 지원할 대학을 정해주기 때문에 선수들은 정해진 한 곳에만 원서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야구 특기생 입시가 실은 고교 감독과 대학 감독 사이의 사전 협의로 진행되는 '짬짜미'라는 주장이었다.
선수들이 선호하는 주요 대학의 경쟁률이 한결같이 거의 1대1 수준이라는 점도 사전 내정이 있었다는 정황을 뒷받침한다. 올해 야구 특기자 입시에서 10명을 선발하는 고려대는 딱 10명이 지원했고 9명을 뽑는 연세대는 12명이 지원(1.3대1)했다. 11명씩을 선발하는 중앙대와 경희대도 각각 13명(1.2대1)이 원서를 냈다. 전국 고3 야구 선수 600여명 가운데 프로 선수로 지명받지 않은 선수는 500여명. 야구 전형이 있는 4년제 대학 입학 정원이 200명가량이므로, 선수들이 한 곳씩만 지원해도 경쟁률은 2.5대1 이 넘는다. 더구나 수시모집은 최대 여섯 대학에 지원할 수 있어 실제 경쟁률은 이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 평균 세 곳에 원서를 내는 일반 고3 수험생들의 사례를 적용하면 경쟁률이 7.5대1은 돼야 한다. 다른 구기 종목의 경쟁률은 최소 3대1이 넘는다.
서울의 한 고교에서 야구부장을 맡고 있는 체육 교사는 "일단 원서를 넣으면 선발 과정에서 대학 감독이나 고교 감독이 입시 전형에 간섭할 수 없으니 애초에 지원할 애들을 미리 정해 경쟁률을 1대1로 만드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다른 유명 고교 야구팀 감독은 "미리 스카우트를 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금지돼있는 사전 스카우트 제도가 '입시'라는 허울 아래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정해준 대학 외에 여러 대학에 원서를 내면 선수 생활이 어렵다고 학부모들은 말했다. 서울 S고 3학년 H(18) 선수는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여섯 대학에 지원했다가 '왕따'가 됐다. 감독은 "면접에 가도 어차피 떨어질 거니 가지 말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H군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입시 부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원한 6개 대학 가운데 경희대에 합격한 H군은 야구를 그만둘 계획이다. "감독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좁은 야구판에서 더 이상 운동을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서울 B고 P(18)군은 감독이 지정해 주지 않은 K대에 수시 지원을 했다가 떨어졌다. 11명 선발에 13명이 지원했다. P군의 아버지는 "미리 내정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했는데 역시나 떨어졌다"고 말했다. 한 학부모는 "스타를 '입도선매'하는 거면 이해나 하겠지만 '누구는 3000만원 줬다더라, 누구는 1억원을 줬다더라'는 식의 얘기가 들리니 감독이 지시하는 한 대학만 지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각 대학은 "지원자를 고교 감독이 추렸다고 해도 일단 지원한 학생들 대상으로는 정상적 전형 절차를 거쳐 선발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내정자 명단과 합격자 명단의 대조 요청을 거부한 고려대 측은 "야구 감독들 사이에 담합이 있었다면 검찰 수사를 받으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