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前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서울 한복판 안국동로터리를 지켜온 여성 교육의 요람 풍문여고가 2017년 세곡동으로 이사를 한단다. 도심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예견됐던 일이다. 이런 도심 공동화로 등장한 것이 '도심 재창조' '창조 도시' 개념이다. 도심의 유서 깊은 학교를 이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심 학교 부지를 매입하는 기업·개인은 매각 후 10년간 일반 지역의 절반 수준으로 건폐율을 제한받아 쉽게 나서지 못한다. 일반 지역에 비해 용적률도 낮다.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학교 부지를 사들이지 않는 한 학교 이전이 어려운 이유다.

이 자리에 공예미술박물관을 건립할 것을 제안한다. 중앙정부나 서울시가 부지를 매입하면 이전도 수월하고 전통 공예 문화를 다시 꽃피울 거점을 만들 수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실과 중앙관청이 필요로 하는 각종 공예품을 제작하던 공조·상의원·군기시 등 30여개 중앙관청 소속 공방(工房)이 있었던, 역사적으로 공예의 전통이 깃든 자리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 중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전통공예가와 수공예 작가들이 골목골목 공방을 차려 제작하는 작업장이다. 외국 관광객에겐 작품 제작 광경을 둘러보고 공예품·장신구를 사는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게다가 경복궁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북촌과 공예미술박물관을 거쳐 인사동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축을 조성해 수도 서울의 600년 도읍으로서 역사성과 대한민국 국격을 상징하는 문화의 거리로 거듭날 조건을 갖춘 곳이다.

공예는 삶을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가꾸거나 이끌어 온, 문화의 총합이자 문명의 일부다. 또 일상사·미시사(微視史)인 동시에 생활사를 증명하는 사료(史料)로서 가치까지 지닌다. 순혈주의 제작 기법으로 정체를 빚고 있는 전통 공예와 조형적인 면모를 추구하는 현대 공예의 융합과 통섭을 통해 이 시대 공예 문화를 창출해낼 절호의 기회다.

공예미술박물관을 통해 문화 융성의 군불을 이제라도 때기 시작한다면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 '21세기 한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라도 입으로만 전통의 가치·복권을 외칠 게 아니라 공예의 가치에 주목하고, 공예에 오늘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 중심에 공예미술박물관을 두어야 한다. 풍문여고 부지에 들어설 공예미술박물관은 600년 도읍지 서울의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