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극장가 한국 영화는 조금 과장하면 '문정희와 문정희의 대결'이었다. 박스오피스는 인터스텔라, 헝거게임 모킹제이, 퓨리 등 외화가 이미 점령한 상태. 그나마 버텼던 한국 영화가 '카트'와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두 편이고, 두 영화 모두 열쇠를 쥔 배우는 문정희(38)였다.
영화 '카트'에서 그녀는 꿋꿋한 싱글맘으로 수많은 직장 여성들의 울컥하는 감정선을 건드렸다. 아들 치료비 때문에 동료 곁을 떠났던 그녀가 돌아와 함께 카트를 밀던 마지막 부분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최고 장면으로 꼽는다. 가족 코미디 '아빠를…'은 명문대 출신 백수 남편(김상경)을 어린 딸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겠다'고 나서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그녀는 이번에도 착하고 순수한 남편과 딸을 부양하는 아내 역이다. 이 험한 세상에서 착하고 순수한 건 때로 무책임이나 무능력과 동의어. 영화 속 그녀는 가정도 지키고 극의 중심도 지키는 기둥이다.
지금 문정희는 어느새 한국 영화에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던 여배우의 역할을 채워주는 배우가 돼 있다. 21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카트에서는 내가 캐릭터에 욕심 부리지 않고 밸런스를 잡는 게 중요했어요. 영화 자체가 가진 의미가 컸으니까요." '아빠를…'에서 다른 캐릭터들이 웃음을 위해 이리 튀고 저리 튈 때 문정희는 유일한 '정상'이다. 그녀는 "아빠가 철없는 남자를 대변하며 과장된 웃음을 유발한다면, 아내는 현실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게 맞다고 봤다"고 했다. "미용실을 운영하다가 갑자기 집주인한테 쫓겨나고 그런 게 현실이잖아요. 그러면서도 남편에게는 부담 주지 않으려 하고. 서로가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는 결말로 가려면 제가 맡은 캐릭터는 좀 더 현실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쁘긴 예쁜데 부담스럽지 않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만 사실 속은 여리다. 그런 정서적 균형을 여배우가 연기로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올 초 송윤아와 함께 출연한 TV 드라마 '마마'를 "연기 인생 변화의 계기가 된 작품"으로 꼽았다. '줌마돌', '언니 킬러'처럼 팬들이 붙여준 별명도 그때부터 조금씩 생겼다. "30~40대 여성들도 좋아하셨지만 10대 팬클럽도 생겼어요. '오늘 문정희 입덕했어(팬이 됐다는 은어)' 같은 말을 쓰는 평균 18~19세 팬들이 생기니 깜짝 놀랐죠." '카트' 무대 인사 때는 처음으로 팬클럽이 플래카드를 들고 찾아왔다. "팬레터를 보면 왜 저를 좋아하게 됐는지 구구절절 사연이 많았어요. 엄마가 너무 아파서 간호하느라 지쳐 있을 때 힘이 됐다는 분도 있었는데…. 카드를 사다가 손편지로 답장을 썼어요."
많은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했고, 연가시(2012)와 숨바꼭질(2013) 이후 주목받으며 드라마와 영화를 오갔다. 그녀는 지금도 "어린아이가 본능적으로 역할놀이에서 무언가 해내는 것처럼, 삶의 한 단면을 잘라 보여주는 듯한 상상력과 답을 가진 배우"를 꿈꾼다. "아주 어렸을 때 소꿉장난하며 임신하는 놀이를 하면 정말 배가 너무 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도 배우는 그렇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이 배우, 작품을 거듭할수록 연기도 사람도 더 단단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