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2009)는 배우 김새론의 데뷔작이다. 르콩트 감독의 연출력 보다는 김새론의 연기력으로 주목 받은 영화다. 하지만 아마도 감독 자신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어디로 쏠리든 어떤 아쉬움도 없었을 것이다. 르콩트 감독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렇게 했다.

아버지에게 버림 받고 고아원에 맡겨진 소녀는 르콩트 자신이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외국인에게 입양된 소녀도 우니 르콩트다.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이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하기 위해, 혹은 그 시절과 이별하기 위해 르콩트는 영화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거인'도 그렇다.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 그룹홈에서 생활하며 어린 나이에 삶의 무게를 홀로 견뎌야 했던 김태용(28)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영재'(최우식)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는 짐이다. 어머니는 영재가 동생까지 책임지기를 바란다. 천주교가 지원하는 그룹홈에서 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에 가 신부가 되는 것이 영재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주변 누구도 영재를 돕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한다. 친구도, 그룹홈 원장도, 부모도, 동생도. 영재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발버둥친다. 영재는 소리친다. "왜 아무도 날 책임져 주지 않는 거야." 영재는 고등학생이다. 이제 조금은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게 된 나이 스물여덟. '그 시절'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영화 감독으로 발을 내딛는 이 순간, 김태용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내야 했다.

"글쎄요. 언젠가는 해야 했겠죠. 왜 지금 시점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죠. 일단은 저의 10대를 영화로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저의 10대를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나라도 나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살아갈 용기가 필요했어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는 313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거인'도 그 중 한 편이었다. 임권택, 허안화, 장이머우 등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이 즐비했지만, 가장 주목받은 건 '거인'이었다. '거인'은 시민평론가상을, 주인공 영재를 연기한 배우 최우식은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밝은 영화가 아니라서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제가 의도했던 것처럼 위로를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특히 영재 나이대 아이들이 그랬어요. 저한테는 용기가 필요했던 작품인데 그 용기를 보상받은 느낌입니다."

김태용 감독은 '위로'를 말했지만, '거인'에는 그럴싸한 위로가 없다. 오히려 영화는 잔인하다. 카메라는 영재를 따라 다니며 그의 아픔을 그저 드러내 보일 뿐이다. 과장된 슬픔과 허울뿐인 희망을 쉽게 드러내는 청춘영화의 공식을 김태용 감독은 외면한다.

김 감독은 "맞다"고 답했다. "위로라는 게 꼭 어루만져줘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 아픈 아이들이 많다는 의미"라며 "영재에게 공감했다는 것 그 자체가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우리 영화계에는 10대가 주인공인 좋은 작품이 여럿 나왔다. 김새론과 배두나가 주연한 '도희야'와 천우희가 열연한 '한공주'가 대표적이다. '도희야'는 이버지의 폭력을, '한공주'는 성폭행을 소재로 삼았다. 보통의 한국영화는 특정 사건을 토대로 10대에 접근한다. 사건을 통해 피해자와 주변 인물을 들여다 보는 방식이다.

'거인'은 다르다. 이 영화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 영재가 그룹홈에서 자라는 게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카메라는 주인공 영재의 일상을 담는다. 영재가 밥 먹는 모습, 영재의 등굣길, 영재의 수업시간, 영재의 성당 활동 등. 이게 전부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마음을 흔든다.

"소재적으로 10대에 접근하는 게 아니라 10대의 평범한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영악함이라든지, 진정성 같은 걸 보고 싶었습니다. 솔직한 성장영화가 나오기를 바랐던 거죠. 이런 틀에서 '우리 사회가 영재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화두도 던져보고 싶었던 겁니다. 또 이런 게 있었어요. 영재라는 아이가 이 상황에서 어떤 어른으로 자랄지 그 가능성을 보고 싶기도 했던 거죠."

'거인'에 특별한 게 있다면, 그것은 영재라는 인물 자체다. 영재는 이중적이다. 그는 그룹홈의 '아빠'와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신학대학에 가기 위해 신부에게 아부 섞인 행동도 스스럼 없이 한다. 동시에 영재는 그룹홈 지원품을 훔쳐 친구들에게 팔아 용돈을 마련한다. 그룹홈 친구가 도둑 누명을 써도 모른 척한다. 영재의 머리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김태용 감독은 이를 "서글픈 영악함"이라고 규정했다. "드라마 속에 영재가 있는 게 아니라 영재라는 캐릭터 자체가 드라마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영재를 전면에 내세운 것에 대해 "영재를 책임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드라마 속 인물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태도는 촬영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카메라는 영재를 따라다니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그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클로즈업한다. 영재의 감정에 관객들이 공감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느끼는 게 아니라 "관객이 영재를 체험하게 하려고 했다"는 게 의도다. 감독의 의도는 잘 맞아 떨어진다. 무심히 영재를 '구경'하던 관객은 아마 영재가 결국 눈물을 보일 때, 안타까움에 몸을 뒤틀지 모른다. "영재의 감정 한순간, 한순간을 최대한 담고 싶었습니다."

'거인'이 관객의 마음을 헤집어 놓을 수 있는 건 대사와 상황의 디테일 덕분이다. 이 디테일들은 '툭'하고 무덤덤하게 제시되지만 마음에 날카롭게 꽂힌다.

사람들은 영재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네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지마. 다 그렇게 살아." 영재는 어설프게 사람들을 협박한다. "저 신부 꼭 돼야 해요. 제가 길거리에서 물건 훔치면서 인간 쓰레기로 살기를 바라세요?" 그리고 영재가 그룹홈에서 밥을 먹는 장면. '거인'에는 밥 먹는 장면이 많지만 이상하게 영재는 그럴 때마다 불안해 보인다.

"사람들이 저한테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었죠. 네가 최악은 아니라면서요. 사실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에요. 저는 항상 그 말에 화가 나 있었어요. 저를 책임져 주는 어른이 없다는 게 화가 났어요. 그 다음 대사는 속으로 자주 했던 말이에요. 그리고 밥 먹는 장면. 전 편하게 밥을 먹은 적이 없었어요. 항상 많은 사람들과 먹어야 하고, 남기면 안 되고. 밥 먹는 게 노동이었죠. 눈치를 계속 살펴야 하니까요."

고등학생이던 김태용 감독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가슴 속에 다가온 것이 영화다. 살아가기도 바쁜 상황에서 상상 따위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믿던 이 시니컬한 소년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을 우연히 보고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영화가 제 인생을 바꿨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영화에는 인간의 극한을 보여주는 순간들이 있어요. 다르덴 형제,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그래요. 내 삶을 쪼개 배우와 교감하고 그 교감이 배우를 살게 해요. 아름다운 일이죠."

김 감독은 2005년부터 영화를 시작했다. 연출에 참여한 영화만 열 편이 넘는다.

어린 시절 삶을 겪어내야 했고, 지금도 살아내고 있는 김 감독은 '거인'을 통해 명확히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는 영재에게 과외를 해주는 대학생 윤미의 대사에 "충고 비슷한 게 담겨있다"고 말했다. 영재는 윤미에게 선물을 주면서 말한다. "누나. 신부님한테 저 좀 잘 말해주세요. 저 신학대학 꼭 가고싶어요. 저 꼭 가야해요." 그러자 윤미가 답한다. "영재야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진짜 꼰대같네요.(웃음) 다만 그런 겁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빠를수록 좋다는 거죠. 자기를 포장하지 말고, 만들지 말고, 딱 자신이 갖고 있는 것만 믿어도 큰 힘이 될거라는 겁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죠."

영화 후반, 영재에게는 변화가 생긴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인 영재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을 보인다. 동생을 찾아가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재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어요. 여전히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영재를 떠나 보낸 거죠. 거인이 됐지만 남들이 피하지 않는 거인이 됐으면 합니다. 그건 지금의 저 자신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렇다면 김태용 감독의 현재는 어떨까.

"누군가에게는 '거인'이 영화이지만, 저에게는 삶의 일부분이죠. 이제 곧 '거인'과 저만 남겨지는 상황이 올 겁니다. 지금도 가끔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외로울 거예요. 그걸 또 극복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