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등반은 길이 끝나는 데서 시작하지만, 이번 원정대는 있는 길을 찾아 연결해가는 것이었다. 지원 차량 여섯 대와 25명가량 인원이 함께 움직였다. 길은 있지만, 각국의 통관절차를 거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출발점 독일에서 차량을 통관시킬 때부터 속된 말로 반쯤 죽었다."

한창나이라고 말해도 될 김창호(45) 대장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다. 세상을 겪은 '영감' 느낌이 들었다.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를 이끌면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의 인격(人格)은 원정 기간 불편과 짜증, 분노를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다큐촬영팀은 좀 더 극적인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사건·사고가 많기를 원했다. 내게는 '재미없는 원정대', 안 재미있게 가는 것이 성공이었다. 자전거에서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는 상황을 안 만드는 게 원정대장이다."

김창호 대장은“원정대가 통과할 때마다 날씨가 좋아졌다. 정말 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 10일, 원정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이번 원정의 국외(國外) 종착점이다. 사실상 다 왔다는 뜻이다.

원정대는 '통일'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90일을 달려왔다. 지원 차량에 찍힌 거리를 보면 1만5000㎞ 이상이다. 출발할 때는 8월 여름이었는데 늦가을이 됐다.

―원정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원정 100일 동안 자기 욕망과 싸워야 한다. 집단생활을 하는 원정에서는 누구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편하지 않으면 동료가 밥을 많이 먹는 것까지 미워지는 법이다. 대원들에게 '참아라, 다른 방법이 없다. 상대의 좋은 점을 보라'고 말해왔다. 순간순간 고비는 있었지만 대원들은 현명하게 잘 넘겼다."

―장기간 원정에 성공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니까. 대원들은 오랜 관계를 맺었다가 같이 온 게 아니다. 선발 후 두 달 만에 나왔다. 또 원정단에는 우리 자전거팀만 있는 게 아니라 운전·취재·다큐촬영·행정팀이 있다. 다들 고생하지만, 가장 조명을 받는 게 자전거 대원이다. 다른 팀들과 잘 어울려가는 것이 중요했다."

―자전거 대원들은 젊고 개성이 강했다. 제각기 참가 목적도 달랐을 것이다.

"다들 색깔이 있다. 나는 이들에게 '하지 말라'는 말은 거의 안 했다. 이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게끔 칭찬했다. 젊은 대원들은 나이 차 때문에 나를 얼마간 어려워했다. 밤에는 저네들끼리 맥주를 마시게 하고 자리를 피해주곤 했다. 그래야 대장 욕도 하고 속이 풀리지 않겠나. 서울에 들어가면 먼저 대원들에게 '고맙다' 인사부터 할 것이다."

―대원을 선발할 때 어떤 점을 많이 봤나?

"신청자가 폭주했다. 자전거 잘 타는 사람을 1~7등까지 뽑은 게 아니다. 이번 원정은 '자전거 레이스'가 아니다. 상대를 이겨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장기간 해야 하니까 인내심을 갖고 화합을 잘할 수 있느냐, 힘든 상황에서 동료를 잘 도와주느냐를 봤다."

―대원 중 '홍일점' 김영미 대원이 무엇보다 힘들었을 것 같다.

"우리가 타는 자전거는 장거리용(네덜란드 제품)이라 무겁다. 남자 체형에 맞게 세팅됐다. 체구가 작은 김영미 대원에게 안 맞았다. 그래서 라이딩 자세가 좋지 않아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김 대원은 아파서 푹신한 침대에서 못 자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중간에 자전거 부품들을 뜯어 새로 조립해줬다. 여성이라 운행 도중 벌판에서 볼일을 보는 것도 그렇고…. 나는 대장이기에 김 대원의 생리일까지 알아야 했다. 그 기간에도 자전거를 탔으니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회의는 없었나?

"초반 구간에는 거의 쉬지 않고 탔다. 휴식일에는 원정단의 현지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카메라가 늘 따라다니니 대원들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는 가야 할 길을 생각하니 막막한 심정이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침에 눈 뜨면 출발했다. 그렇게 익숙해졌다."

―어느 지점에 닿았을 때 확신을 가졌나?

"원정 50일쯤 됐을 때다. 이르쿠츠크(시베리아의 도시)에 닿기 직전 불쑥 '우리가 이제는 한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전율이 왔다. 이제는 어떻게든 최종 목표점까지 갈 수 있겠다 싶었다."

두만강을 뒤로 둔 중국 투먼(圖們)에서.

―왜 그날 한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나는 대원들의 후미에서 자전거를 탔다. 그런데 뒷모습만 봐도 '누가 지쳐 있구나' '저 친구가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느낌이 온 것이다. 대원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여기서 쉬었다 가겠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자전거 운행 동안 언제 가장 힘들었나?

"몽골 입경 전날인 캬흐타(시베리아 동부의 도시)에 도착할 때였다. 오르막이 계속됐고 맞바람이 불었다. 자전거 운행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바람과 오르막, 노면 상태, 차량이다. 그때 우리는 자전거 대형을 세모꼴로 갖춰 바람을 뚫고 나갔다. 중간에는 52세 박영석 대원을 넣었다. 바람을 온몸으로 받는 선두는 30분마다 교대시켰다. 이날 밤 8시 숙소에 도착했다. 다들 녹초가 됐다."

―페달을 밟는 동안 누가 가장 많이 떠올랐나?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고 할지 모르나, 사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었다. 생각이 없으면 편안했다."

―오래 떨어져 있는 가족은?

"아내한테 미안하나 정말 생각이 없었다. 숙소에 들어와 카톡을 할 때만 생각이 났다."

―원정 기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우리 가수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를 때 정말 가슴이 뜨거웠다."

―그건 출발하기 전인데.

"사실 베를린에서 출발해 우랄 산맥을 넘기 전까지는 평원(平原)이 이어졌다. 숲의 수종도 마가목·자작나무·소나무로 비슷했다. 우랄 산맥도 높고 험한 산들이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대관령보다 낮은 구릉이었다. 통과하고서야 '우랄 산맥'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 뒤에도 역시 평원이었다. 그날이 늘 그날 같았다."

―왜 그런가?

"아마 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40일간 히말라야 등반을 가면 하루하루를 다 기억한다. 하지만 평원이 계속되니 단조롭고 구별이 안 됐다."

―내 개인적으로는 내몽골을 지나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에 들어와 산이 보이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이 지상(地上)에 변화와 입체감을 주는 것 같았다.

"맞다. 산은 축복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유라시아 길에서 가장 멋진 곳은?

"내게는 몽골의 고비 사막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포장도로를 따라왔지만 사막 저 너머에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미지의 느낌,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고비 사막에서 조약돌을 주워왔다."

―사막 저 너머에는 또 사막이지 않겠나?

"막상 가보면 그렇겠지만. 나는 나중에 말과 낙타를 타고 고비 동쪽에서 고비 서쪽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보니 약 2800㎞다. 그 끝에는 몽골에서 가장 높은 후이텐 산(4355m)이 있다."

―원정 동안 현지인들의 반응은?

"중국을 빼고는 다 환대를 받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고속도로에서도 자전거를 타봤다. 경찰이 다른 차량을 막고 컨보이(호위)를 해준 거다. 그 나라 꼬맹이들은 거꾸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환송해줬다. 다른 나라에서도 현지 경찰이 원정대가 들어가고 나올 때까지, 심지어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도 지켜줬다. 자전거로 달리는 동안 목동이나 농부들이 손을 흔들어줄 때는 뭉클했다. 행사장 무대에서 박수받는 것보다 나았다."

―식사는?

"현지식을 했지만, 점심때는 컵라면·햇반·알파미로 취사를 한 적이 많았다. 우리 같은 사람은 잡식성이라 숟가락을 빼고는 다 먹는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라면을 안 먹는다. 원정 기간 내가 10년간 먹을 라면을 다 먹었다."

―원정 기간에 신기하게도 날씨가 다 좋았다. 기온은 위도(緯度)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원정대가 달려온 북쪽보다 서울이 더 추울 때가 많았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 폭우를 두 번 맞은 것 빼고는 날씨가 다 좋았다. 시베리아로 가기 전 '눈폭풍이 분다'고 했지만 가보니 화창했다. 우리가 통과할 때마다 날씨가 좋아지는 것이다. 운이 따랐다는 말밖에…. 우리끼리 '원정단원 중에 전생에 나라를 구한 분이 있는 것 같다'고 농담했다."

―이번 원정대는 전체 일정과 통관 날짜, 행정 규제, 도로 여건 등으로 전 구간을 자전거로 달리지는 못했다.

"좀 아쉬움이 있지만 크게 미련이 남는 건 아니다. 자전거로는 다 달리지 못했으나, 적어도 운전팀은 자동차로 유라시아 대종주를 한 셈이다."

―원정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고 보나?

"개인 한두 명이 자전거로 달리는 것과는 달리, 태극기와 한국 번호판을 단 지원 차량 여섯 대가 따르는 원정단으로 가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원정대 명칭(평화와 통일을 위한 원코리아 뉴라시아)에 메시지가 담겨 있다. 친환경적이고 인간의 힘으로 가는 자전거를 도구로 선택한 것도 정말 잘했다고 본다."

―원정대가 끝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대원들 마음속에는 북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 평양과 개성을 거쳐 판문점으로 가는 기대가 있었다. 그게 우리의 숨은 동력이었다. 중국의 단둥(丹東)에서 압록강 다리를 건너지 못했을 때 '지금은 안 되는구나' 정말 낙담했다. 그러면서 '이 원정을 한 번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농담했다."

―정말 또 하라면?

"이제 낙타도 타고, 히말라야도 가야 한다. 내년 등반 스케줄이 짜여 있다(그는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한 산악인이다)."

이번 원정에서 나는 후반부 한 달 구간에 합류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박편으로 오는 13일 동해항으로 귀환한다. 이어 국내에서 사흘간 더 달린 뒤 국회의사당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릴 것이다.